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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주·임형남의 골목 발견] 추억을 자극하며 도시에 숨을 불러일으키는 곳

조선일보 글= 노은주·임형남 가온건축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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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길에서 들어가 동네 안을 이리저리 통하는 좁은 길, 골목.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잘 닦여진 네모 반듯하게 새로 생긴 동네에 사는 지금의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골목은 아이들에게 놀이 공간이었고, 엄마들의 수다 공간이었고, 어떤 이에겐 데이트 공간이었고, 함께 사는 사람들의 대소사를 함께 했던 공간이었다.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옛날' 골목이 아직도 남아있는 그곳을 함께 걸어보자.


조선 시대엔 돈암동 부근을 적유현(狄踰峴)이라 했다. 적유현이라는 이름은 병자호란 때 되놈이 그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쳐들어왔다고 하여 붙여진 '되너미고개'의 한자 표기였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지명을 일괄적으로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소리를 성의 없이 한자로 표기하는 바람에 돈암동으로 변했다고 한다.

돈암동에는 학교가 많이 있어서였는지 학생들이 길에 널려 있었고 학생들을 기다리는 분식집, 문방구 또한 널려 있었다. 1930년대 일제에 의해 주거지역 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면서 지어진 한옥들이 고갯길까지 행렬하듯 가득 메웠다. 성 밖 외진 곳이었던 돈암동에 사람이 몰리게 된 것은 전차가 개통되면서라고 한다. 돈암동 전차 종점 부근에 태극당이라는 큰 빵집이 있었는데, 그 일대의 명소였다.

아주 오랜만에 돈암동을 찾은 날은 장맛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이었다. 한옥들은 거의 크고 작은 건물들로 바뀌었고 주택가는 상업 지역으로 바뀌어 예전의 장소들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기사 더보기


남산과 서울시청 사이에 남창동과 북창동이 있다. 이 근처에 대동법이 시행되었을 때 만든 창고가 있어서 남대문 인근을 '창동'이라 불렀다. 그것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쌀 미(米) 자가 붙은 남미창정, 북미창정이 되었다가 다시 남창동, 북창동이 되었다.


좁은 골목길과 그 골목에 얼굴을 비비며 빼곡하게 들어차 있던 집들, 동네 끄트머리 소공동 경계에 한국은행이 있었고 시경이 있었으며 길을 건너면 남대문시장이 있었다. 번잡한 시장 뒤 남산으로 향하는 남창동의 조용한 주택가는 사람 사는 집들이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길 건너 북창동은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1990년대 이후 퇴폐적인 유흥업소들이 많이 들어서면서 변색되었지만 요즘은 늘어나는 관광객 수요에 맞춰 유흥업소 대신에 호텔이 급격히 늘어나는 중이라고 한다. ▷기사 더보기


우리 나라에는 크고 작은 패션숍으로 채워진 '로데오'라는 이름이 붙은 거리가 많다. 미국의 패션 중심 거리인 베버리힐스의 '로데오 드라이브'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그 중 굳이 원조를 찾는다면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를 들 수 있다.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유명해졌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것은 70년대 말 시작된 압구정동 개발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다.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는 압구정동, 신사동 등의 급격한 성장 속에서 태어났고 80년대, 90년대를 관통하는 소비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외환 위기가 닥치며 사람들 발길이 뚝 끊어지고 나서는 아주 한적한 거리가 되었다. 지금은 일본인이나 중국인 관광객이 약간 왔다 갔다 할 뿐이다. ▷기사 더보기


삼선교 입구에서 시작해서 삼청터널까지 이어지는 성북동은 소박한 골목부터 호화로운 주택가, 그리고 불쑥불쑥 나타나는 심산유곡의 유현함까지 볼 수 있는 무척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동네이다. 성북동은 평창동과 더불어 대표적 서울 부촌이었다. 그런데 언덕 위에 높은 담장이 있고 그 안에는 궁궐처럼 큰 집들이 들어서며 부촌이 된 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고 한다.

성북동에는 두 얼굴이 있다. 서울 성벽에 붙은 언덕에 펼쳐진 오래된 골목이 있는 북정마을과 같은 소박한 마을과, 건너편 언덕 위에 60년대에 진행된 택지 개발로 이루어진 큰길에 면한 저택들이 공존한다. 성북동 골목은 온종일 인적이 드물어 조용하고 아늑했다. 지나는 사람 또한 늘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아마 골목의 효용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기사 더보기


명동(明洞)이란 조선시대 한성의 행정구역 49방(坊) 중 하나인 명례방(明禮坊)에서 유래했다. 원래 주택지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충무로 일대가 상업지역으로 발전하면서 그 여파로 상업지역으로 변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명동에 갔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늘었고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점이 거리를 메우고 있어 예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과 활기가 그득했다.

명동 동네 구조는 동서로 굵은 길이 가로지르고, 남죽으로 다양한 폭의 여러 길이 나뭇잎의 가느다란 잎맥처럼 가지를 뻗는 모양으로 되어있다. 그중 유네스코 옆길을 가는 줄기 중 하나로 작은 좌판들과 호객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고개를 들어 명동의 하늘을 바라봤다. 한국어·영어·일본어·중국어·프랑스어, 심지어 아라비아어까지 세상의 모든 언어가 들어있는 무수한 간판이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간판을 보며 너무 복잡해서 정신 없다고 하지만 그 복잡함과 현란함과 유치함이 가득한 다양성은 바로 명동의 얼굴이며 명동의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기사 더보기


옥인동은 옥동과 인왕곡이 합쳐진 지명이다. 지금이야 서촌이라는 동네는 사람들이 사진기 들고 찾아가고, 커피 마시러 찾아가고, 답사하러 일부러 찾아가는 곳이 되었지만 90년대 초에 옥인동을 비롯한 경복궁 서쪽 동네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서울 속의 벽촌 같은 곳이었다.

옥인동 군인아파트 부근은 겸재 정선이 장년이 되어 이사해서 생을 마칠 때까지 살았던 집터가 있던 곳이었고 일제 강점기로 넘어오면 친일 행위로 크게 부귀영화를 누렸던 윤덕영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다.


옥인동 골목은 예전에 오랫동안 계곡이 있었고 소나무 숲이 있었던 곳이 근대를 거치며 메워지고 채워진 곳이다. 그래서 땅의 흐름과 골목의 흐름 속에 에전의 자취가 점점이 박혀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곤 한다. 휘젓지 않으면 절대로 모습을 보여주지 않지만, 이야기를 듣고 들어가면 마치 오래된 문이 열리듯이 시간의 문이 열리며 우리에게 장관을 보여주는 곳이다. ▷기사 더보기


남산은 하늘이 서울에 내린 축복이다. 서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산이라 어디를 가건 쉽게 볼 수 있다. 예장동, 필동, 남산동 등 남산골이라 불리는 동네도 남산의 넉넉한 품안에 피어난 동네다. 남산 북사면에서 서울의 중심으로 흘러내릴 듯한 지형에 모여 있는 이 동네를 조선시대에는 남촌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남산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남산골은 일본이 조선을 억누르며 제일 먼저 개조한 곳이기도 하다. 남산 주변으로 일본인들이 사는 마을을 만들었다. 이후 해방이 되며 국기가관이 들어오고 학교들이 들어오며 남산골은 빠르게 변모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군부대도 떠나고 남산 1호 터널 근처에 있었던 중앙정보부도 떠났다. 그리고 그곳들은 이제 문화적인 장소로 치환되고 있다. 마치 아린 상처를 덮고 치유하는 연고처럼 문화는 남산의 상처를 덮어주고 있다. ▷기사 더보기


서교동이라는 지명에는 다리(橋)의 서(西)쪽에 있는 동네라는 의미가 있다. 원래 서교동은 한적한 대학가이면서 잘 지은 주택들이 길을 따라 가지런히 놓여 있는 동네였다. 홍익대 앞은 화방이 여러 군데 있었고, 미술학원도 많아서 인근뿐 아니라 전국의 고등학생이 몰려들었다. 그런 곳에 새로운 진주군이 들어앉았다. 지하에 공연을 위한 클럽이 생기고 인디밴드라고 부르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그 안에 채워졌다.

그 후 주차장이나 지하를 차지하고 있던 가난한 예술가나 가난한 학생들은 점점 외곽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는 흥청거림이 주된 테마인 업종으로 채워졌다. 젊음이 몰려온다는 소문이 퍼지며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업종이 홍대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 동네를 관장하는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많은 유동 인구의 유입을 굉장한 호재로 받아들여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어냈지만 소음과 굉음이 버무려지고 요란한 간판과 전단이 뒤엉켜 있는 걷기 불편한 거리가 되었다. ▷기사 더보기


청계천 아래, 남쪽으로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 3가 역에 맞닿아 있는 블록이다. 예전에 그곳에 갓을 만드는 갓방들이 있었고 유명한 우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갓방 우물골'이라 부르다 한자로 음역하여 '삿갓 립(笠)'과 '우물 정(井)'자를 쓰면서 현재의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주로 중인과 서민이 거주했던 동네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전통적 상권이었던 종로 상권과 일본인들이 주도권을 잡았던 충무로, 퇴계로 사우건의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지역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모든 자본의 중심이 강남으로 옮아가 그때만큼 화려하지도 번잡하지도 않다. 하지만 아직도 그 시절을 일구었던 세대의 많은 분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덕에 가게도 많고 오가는 이도 많다. ▷기사 더보기


아현동은 애오개 혹은 아이고개라는 이름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라고 한다. 고개가 높아서 올라가며 '아이고' 해서 그렇다는 말도 있고, 아이의 무덤이 많아서 그렇다는 말도 있다.

아현동은 골목이 다양한 경사로 이루어져 사뭇 삼차원적이며 입체적이다. 집들이 들어서 있는 골목은 경사로 이어지다가 급기야 어른들이 '가이당'이라고 부르던, 하늘에라도 오를 듯 솟구쳐 있는 계단을 만나 한참 기어 올라가기도 한다. 아현동에서도 특히 신촌 방향으로 이화여대와 경기대 사이에 있는 북아현동은 그 규모와 경사도 그리고 복잡한 정도로 볼 때 우리나라 모든 골목을 통틀어 최고라 할 만하다.

북아현동은 지금 개발이 진행 중이다. 반은 깨끗이 지워졌고, 반은 아직 남아있다. 이 골목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진을 찍어 전시를 하고 인근에 있는 예술대학 학생들이 구석구석 예쁜 그림을 그려주기도 한다. 워낙 자유롭게 자리 잡고 지어진 덕에 북아현동 골목의 표정은 정말 재미있다. 다양한 형태의 집과 대문, 그리고 예상할 수 없는 골목길 등 언제 가서 거닐어도 그 안을 다 알 수 없고 그 흥미가 닳지 않는 곳이다. ▷기사 더보기


안국동에서 종로3가 탑골공원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익선동, 운니동 등 많은 동네를 만나게 된다. 그 길의 끄트머리에 우뚝 솟아 있는 낙원상가가 어서 오라는 듯 시선을 이끈다. 이 동네는 인사동의 동쪽 경계와 길을 사이에 바라보고 있는 아주 한적한 동네이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적은 것도 아닌데 묘하게 조용하다. 대부분 이곳을 잠시 지나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곳에서 생활하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삼일대로'라 불리는 큰길에서 한 꺼풀 안으로 들어가면, 종로 세무서 뒤편에 익선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된 곳인데, 익선동 166번지라고 한옥이 가지런히 모여 있는 블록이 있다. 정세권(鄭世權)이라는 사람이 1930년대에 급속한 인구 유입으로 가중되던 서울의 주택난을 타개하기 위해 북촌에 한옥을 개발할 때 같이 지어낸 곳이다. 그렇게 지어진 도시형 한옥들이 이곳 익선동에 남겨졌다. 블록으로 묶어 개발하려던 계획이 중단되어 땅값만 솟아오른 채 잊혀서 여전히 퇴락하여 서걱거리는 서민의 동네로 남아있었다. ▷기사 더보기


종로 부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무척 북적거린다.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한 켜 뒤로 대로와 평행하게 좁은 길이 이어진다. '피맛길'이란 이름을 가진 길이다. 광화문 앞에서 동대문 인근까지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길에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라고 한다. 길 이름은 '양반들이 탄 말[馬]을 피해 다니는 길'이라고 해서 '피맛(避馬)길'이라고 불렀고, 그 길 양쪽으로 형성된 뒷골목 동네에는 피맛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런데 몇 년 전 피맛길은 조용히 사라졌다. 개발 사업에 대한 보상이 마무리되자 사람들을 몰아내고, 피맛길에 면햇던 작은 필지들을 한꺼번에 모아 거대한 상업 건물로 세우기 위해 길을 둘러싸고 있던 건물들을 중장비로 허물어버리기 시작했다. 원래의 피맛길은 종로1가 청진동에서 종로6가까지 지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거칠게 지워낸 지우개 자국처럼 여기저기 치워진 채 아주 희마한 자국만 조금 남아 있다. ▷기사 더보기

[글= 노은주·임형남 가온건축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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