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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22) 한국 현대무용의 대모 육완순 "50년전 맨발로 바닥 구르니 야만인의 춤이라더군요 하지만 난 그걸 즐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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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무용 살아있는 역사.. 1975년 제자들과 함께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 창단 수많은 무용단·안무가 배출 "이제는 정신으로 이어지길"
춤은 곧 인생.. 일제강점기·전쟁때도 춤 계속 춤에 대한 꿈만으로 美 유학길 뉴욕서 만난 스승 마사 그레이엄 "모방하지 말라, 너의 춤을 춰라"



한국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불리는 육완순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은 "춤이 곧 나 자신이었기 때문에 숙명처럼 그 길을 걸었다"고 말했다. 사진=김범석 기자

지난 4~5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는 '아름다운 40년'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의 마지막 공연이 열렸다.

마지막 무대로 육완순 안무의 '실크로드' 공연이 끝나자 기립박수가 터져나왔고 눈시울을 붉히는 관객도 여럿 보였다.

이날은 한국 최초의 현대무용단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이 공식적으로 해단을 알리는 날이었다.

해외에서도 현대무용이라는 개념이 생소하던 1975년, 동시대 정신을 반영한 춤을 추겠다는 컨템포러리무용단의 혁신성은 국내 무용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곧이어 한국 현대무용 발전과 확산의 중심축으로 약진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이 현재 한국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불리는 육완순(82)이다.

무용계는 그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하던 1963년부터 한국에서 현대무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평가한다. 특히 그가 제자들과 함께 창단한 컨템포러리무용단은 대학동문 무용단의 시초로서, 수많은 현대무용단과 안무가, 무용수를 배출하는 1차 인큐베이터로 기능했다.

그런 컨템포러리무용단이 이번 공연을 끝으로 해단한다고 했을 때 무용계에선 '아쉽지만 잘하는 일'이라는 시각이 많았다. 컨템포러리무용단을 통해 한국 현대무용을 이끄는 주류들이 다수 배출됐고 이들이 독자적인 단체를 일궈 활약하고 있는 만큼 '대승적 해체'가 합당하다는 설명이다. 21세기 들어 눈에 띄는 활동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질적 파운데이션을 넘어 정신적 파운데이션으로' '40년 성과의 매듭을 짓고 컨템포러리 정신의 원조로 영원히 존재하다' 같은 촌평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이 무용단에서 40년간 예술감독을 역임한 육완순도 같은 맥락에서 해단을 먼저 제안했다. 지난 18일 서울 창전동 육완순 무용원에서 만난 그는 다만 "해단이라는 단어는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당대 가장 앞서가는, 자유로운 춤을 불어넣었지. 그게 벌써 40년이에요. 초창기 창단 멤버들이 이제 나보다 더 앞서가고 있어요. 그 제자들이 또 제자를 낳으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 이제는 '컨템포러리'는 이름이 아닌 정신으로 이어갈 때에요. 아름다운 40년으로 마무리 지어야지."

컨템포러리무용단은 40년으로 막을 내리지만 육완순의 춤 인생은 60년을 훌쩍 넘어 현재 진행중이다. 언제부터 춤을 췄는지 시작점을 찍기도 애매할 만큼 그의 인생은 곧 춤이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목숨 부지하기도 위태로웠던 시간 속에서도 꺾지 않았던 게 춤에 대한 고집이었다.

―시대적으로 춤을 출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을 것 같다.

▲우리 집안이 기독교였던 것이 나에게 행운이었다. 교회에서 춤과 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환영받는 일이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다섯 살 때 성탄절 날 찬송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 어리신 예수'에 맞춰 춤을 췄던 기억이다. 지금도 그 안무를 기억한다. 미국 유학 갔을 때 교회 주일학교에서 동양인 선생님을 낯설어하는 아이들에게 그 춤을 가르치며 친해지곤 했다.

―어린 시절 누구에게 춤에 대한 영향을 받았나.

▲전북 전주에서 자랐다는 것 자체가 큰 영향이었다. 전주를 '예향(藝鄕)'이라고 하지 않나. 사람들이 춤을 좋아했고 무용 공연도 많았다. 쫓아다니며 배우지 않아도 늘 보이는 게 춤이었다. 친언니도 무용에 소질이 있어서 사범대를 나온 뒤에 초등학교 무용선생을 했는데 언니한테 직접 배우기도 했다. 어릴 적 친구였던 무용가 김미화의 언니한테도 어깨 너머로 배웠다. 그 언니가 일본 유학 시절 최승희 선생에게 배워 돌아와서 학원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연하게 여러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왜 굳이 불모지와도 같았던 현대무용이었나.

▲그때는 현대무용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나는 그저 자유롭고 창조적인 것이 좋았다. 어릴 때부터 막연한 꿈을 꿨다. 세계적인 무용가. 그게 뭔지도 모르고 꾼 꿈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6·25가 일어나고 오남매, 일곱 명 가족이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눈 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도 춤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마자 무용으로 대학에 갈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다. 당시에 여자가 무슨 대학이고 게다가 춤이 웬말. 할아버지부터 온 가족이 완강히 반대했다. 학비를 댈 형편도 안됐다. "내가 생각해도 불효가 되겠다 싶어서" 혼자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당시 이화여대에 다니던 전주여고 1년 선배에게 편지를 써서 원서를 한통 사달라고 부탁하고 아버지 도장을 훔쳐서 원서를 썼다. 모아둔 돈으로 기차표도 미리 사놓고 집을 나와 살 집도 마련하고 먹을 쌀까지 모아뒀다. 서류에 합격해 시험을 보러 갔을 때는 당돌하게도 학과장에게 면담도 신청했다. 열심히 하면 장학금, 유학 다 가능하다는 대답을 듣고 각오를 다졌다. 아버지도 딸의 이런 열정에 감격해 결국 두손 두발 다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는 이대부고 무용 교사, 경희대 무용학과 강사로 교직생활을 하면서 이화여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1961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대학 입학 때보다 훨씬 험한 산을 넘은 뒤였다. 당시 문교부에서 주관하는 유학 시험에 계속 떨어지자 묘안을 생각해냈다. "미국 내에서 현대무용을 가르치는 대학을 몽땅 찾으니 80개 정도 되더라고요. 안 되는 영어로 현대무용을 배우고 싶다, 장학금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써서 전부 편지를 띄웠어요. 타이프를 칠 줄 몰라서 보내는 데만 한달이 넘었던 것 같아요."

일리노이대학으로 '티칭 펠로우십' 장학금을 받고 갔다. 뉴욕에 있는 마사 그레이엄의 '컨템퍼러리 댄스 스쿨'에 다닐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20세기 최고의 현대무용가에게 배운다는 것은 "황홀함"이었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는 않았나.

▲가난한 나라에서 없는 형편에 왔으니 스스로 주눅이 든 적은 있다. 하지만 선생님이 나를 차별한 적은 없었다. 늘 이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내 춤을 모방하지 마라. 너는 한국 사람이니 한국의 현대무용을 세워라. 너의 춤을 춰라."

―마사 그레이엄은 어떤 스승이었나.

▲신체는 기본,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움직임을 중시했다. 스승으로서의 엄격함, 여성으로서의 자애로움을 갖추신 분이었다. 훈련은 군대만큼이나 엄격했지만 그 안에 진심이 느껴지는 분이셨다. 두 가지가 하나가 됐을 때 좋은 제자를 키우는 씨앗이 된 것 같다. 나도 그걸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귀국 후 1963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그의 첫 발표회는 한국 무용계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그가 직접 안무하고 무대에 오른 작품 '공포' '마음의 파도' '논개' 등을 통해 듣도 보도 못한 움직임이 소개됐다. "맨발 벗고 바닥을 구르고 거꾸로 서는 동작은 어디에도 없었지. 다들 '야만인의 춤'이라고 혹평을 했어요. 근데 나는 그걸 즐겼지. 앞으로 현대무용의 시대가 올거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역시나 시간이 해결해주더군요."

이때부터 한국 현대무용에 새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가 부임한 이화여대 무용과를 필두로 대학에 무용과가 생기기 시작했고 1975년 이대 현대무용전공자 8명을 멤버로 국내 최초 현대무용단 한국컨템포러리 무용단이 만들어졌다. 이와함께 한국 창작 무용 발전의 시금석이 된 소극장 운동이 태동했다. 육완순은 1980년과 1983년에 현대무용단 '탐'과 '네 사람'을 창단시켰고 1985년에는 한국현대무용진흥회를 창립했다.

―수많은 업적 중에 가장 자랑스러운 일을 꼽으라면.

▲한국현대무용진흥회를 통해 한국의 젊은 안무가들이 해외 무대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일이다. 세계적 수준의 안무가 배출을 목표로 시작했다. 2008년부터 시작한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SCF)은 이미 국제적인 수준의 페스티벌로 자리매김했다. 이 페스티벌을 통해 100명 넘는 안무가가 국제 무대에 섰다. 한국의 안무가들도 마찬가지다. 세계 무대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다.

―그런 일들을 다 해내면서 가정을 지킨 게 신기할 정도다.

▲가정과 일 중 하나를 택하라던 남편이, 1971년 당시 명동에 있던 국립극장에서 '단군기원' 공연을 보고 마음을 돌렸다. 아무래도 계속 춤을 춰야겠다더라. 왈칵 눈물이 났다. 이후에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돼 줬다.

당시 서울대 지질학과 교수였던 남편은 현재도 지질학계에서 알아주는 학자인 이상만 선생이다. 육완순은 남편이 써준 대본으로 '우주의 발달상'이라는 작품을 만든 적도 있다. 이상만 선생은 은퇴 후 시인으로 등단했고 그림도 그린다.

하나밖에 없는 딸의 남편은 '국민가수' 이문세다. 처음에는 안정적이지 못한 직업 때문에 반대가 많았지만 이내 따뜻하게 품었다. "내가 무용한다고 핍박받던 때가 문득 생각나더라고."

개척자의 길은 험난했다. 힘도 없고 돈도 없었지만 "춤이 곧 나 자신"이었기 때문에 숙명처럼 그 길을 걸었다. 부정입학 논란에 휘말려 법정에 섰을 때도 고통스러웠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당당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고 이후에 더 열심히 활동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됐어요."

앞으로 그는 한국 현대무용을 세계적으로 키우는 일에 계속 매진할 예정이다. "세계적인 무용가 육완순. 이건 내 평생의 꿈이에요. 한국 무용계를 이끌 인재, 안무가를 키우는 것도. 나무가 더 넓어지고 번성할 수 있는 뿌리 역할을 끝까지 할 겁니다."

한국 현대무용 발전을 위한 조언도 보탰다. "나는, 내가 처음이니까 무용수, 안무가, 교육자, 세 가지를 다 할 수밖에 없었죠. 못할 짓이지. 이제는 자신의 재능이 어디에 있는지 일찌감치 파악해서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해요. 그걸 해줄 수 있는 국가적 지원도 당연히 뒤따라야겠지."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 프로필

△82세 △전북 전주 △이화여대 체육학과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 △미국 일리노이대 대학원 현대무용 전공, 마사 그레이엄 사사 △한양대 대학원 무용학 박사 △이화여대사대부고 교사 △경희대 체육대학 무용학과 전임강사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 △미국 코언대학교 현대무용 명예박사학위△1963년 국립극장 첫 귀국 발표 무대 △미국 카네기홀 '단군기원' 공연 △한국컴템포러리무용단 창단(예술감독) △한국현대무용협회 창립(회장) △제30회 서울시문화상 △88서울올림픽 개회식 안무표창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제13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무용인상 △제3회 아름다운 무용인상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현) △프랑스 바뇰레국제안무대회 예술위원(현) △육완순무용원 대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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