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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범서방파' 고문 나모(50)씨는 2년8개월 전 납치 피해자였다. 호남 최대조직 '국제PJ파' 부두목 조모(56)씨가 2013년 2월3일 영남지역 다른 폭력배를 시켜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나씨를 폭행·감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검찰과 경찰이 촉각을 곤두세운 이유는 나씨가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의 후계자로 지목된 사실이 조직폭력 세계에 공공연히 알려졌기 때문이다. 김태촌이 숨진 지 한 달이 채 안된 때였다.
범서방파 두목의 부재를 틈탄 군소 폭력조직의 세력 다툼이 본격화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왔다. 호남 출신 폭력조직이 서울 주도세력에 도전하는 구도는 40년 전 '3대 호남 조폭 패밀리' 시대를 연 조양은의 '명동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사보이호텔 사건은 재현되지 않았고 조씨는 세력 다툼이 아닌 개인 돈 문제 때문에 납치극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나씨는 이달 16일 구속되면서 전통적 의미의 폭력조직으로서 범서방파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알렸다.
◇ 김태촌-조양은 라이벌 구도서 성장
'정치깡패'가 소탕된 1970년대 서울의 조폭세계는 토착세력 '신상사파'가 장악했다. 호남에서 상경한 폭력배인 '범호남파' 계열이 순식간에 서울을 장악한 계기가 사보이호텔 사건이다.
1975년 1월2일 범호남파 계열 '오종철파' 행동대장 조양은이 조직원 3명과 함께 신상사파 신년회가 열린 사보이호텔 커피숍을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신상사파는 서울 중심가를 범호남파에 내줬다. 조양은은 범호남파 실세로 부상했다.
한동안 서울은 호남 출신 조폭의 각축장이었다. 이듬해 3월 '번개파' 행동대장 김태촌은 무교동 엠파이어호텔 후문 주차장에서 조양은의 보스 오종철을 기습해 부상을 입혔다. '양은이파' 조양은과 '서방파'로 독자세력을 구축한 김태촌은 이때부터 숙명의 라이벌이 됐다.
'3대 호남 조폭'의 또다른 축인 'OB파'는 이동재가 거느렸다. OB파는 1980년 김태촌과 조양은이 동시에 구속수감된 틈에 세력을 키웠다. 1987년 11월 조직원 6명이 양은이파 간부 2명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그러나 이동재는 이듬해 9월 식사 도중 양은이파 조직원들에게 보복을 당해 불구가 됐다.
이동재는 피습 이후 미국에 이민을 떠났다. 반면 서방파와 양은이파는 두목이 수감과 출소를 반복하는 사이에도 명맥을 이어갔다. 나씨는 서방파가 '범서방파'로 거듭난 1989년부터 조직에 몸담고 있었다.
◇ '범서방파' 결성식 종교행사로 위장
김태촌은 1986년 '인천 뉴송도호텔 습격사건'으로 구속됐다가 1989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교도소에서 신앙에 몰두했다는 김태촌은 '신우회'를 결성하고 그해 6월16일 경기 파주에서 '축복기도대성회'라는 종교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검찰은 300여명이 참석한 이 행사를 '범서방파' 결성식으로 판단했다. 나씨는 당시 행동대원이었다. 범서방파는 이듬해 '범죄와의 전쟁'으로 김태촌과 그가 후계자로 지목했던 부두목이 함께 구속된 뒤에도 조직원을 가입시키고 합숙소를 운영했다.
범서방파는 '함평서방파'와 '충장오비파', '방배서방파' 등 산하 조직을 부두목급에게 맡겼다. 나씨는 1990년대 중반부터 조직원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간부 역할을 했다.
범서방파는 2009년 김태촌의 출소에 맞춰 '함평식구파'를 흡수하며 세를 불렸다. 범서방파 가입 혐의로 지난달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옛 함평식구파 두목 김모(49)씨의 1심 판결문에 따르면 범서방파는 2009년 3월 김씨에게 "고향 선후배들 간에 서로 자주 보고 싸우지 말고 마음을 합쳐서 잘하자"며 통합을 제안했다. 함평식구파 31명은 같은해 6월초 서울 송파구의 한 식당에서 범서방파 가입식을 했다.
범서방파와 칠성파를 조폭 수사 당국의 집중 타깃으로 만든 '강남 흉기대치극 사건'은 나씨와 칠성파 간부의 다툼이 발단인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역삼동 룸살롱에서 나씨와 싸운 칠성파 부두목 정모(43)씨가 조직원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전쟁 준비'를 했다는 것이다.
2009년 11월12일 오후 7시 범서방파 비상연락망이 가동됐다. 1차 집결지는 나씨가 운영하는 서울 청담동 고깃집 앞이었다. 범서방파는 한밤 대형마트에서 칼날 길이 30㎝짜리 생선회칼 5자루와 알루미늄 야구방망이 14개를 '연장'으로 마련했다. 청담동 리베라호텔 골목에서 대치하다가 이튿날 저녁 해산을 명령한 것도 나씨였다.
◇ 세력 다툼 자제하고 기업화하는 '3세대 조폭'
조폭의 활동방식이 '갈취형'에서 '합법위장 기업형'으로 바뀐 2000년대 후반 범서방파가 벌인 흉기 대치극은 시대에 뒤떨어진다.
검찰은 전통적 폭력조직 형태를 유지하면서 다른 조직에 위세를 과시하는 이런 조폭을 1990년대 주류였던 '갈취·기업 중간형'으로 분류한다. 범서방파가 결국 느슨한 조직 형태를 유지하며 기업·금융·인터넷 사행산업 등 외관상 합법적인 영역에서 활동할 거라는 관측은 이런 시차 때문이다.
검찰 분석에 따르면 이런 '3세대 조폭'은 조직간 패싸움이나 칼부림 등 전통적 세력 다툼을 자제하고 상호 공존하려는 경향을 띤다. 계파를 초월해 동갑내기끼리 어울리는 '또래 모임'도 있다. 소규모 단위로 활동하다가 필요할 때 조직 전체가 움직이는 '프랜차이즈 방식'도 도입됐다. '온천장 칠성', '서면 칠성' 등으로 나뉜 부산 칠성파가 그런 경우다.
범서방파 계열 폭력조직은 원정도박 브로커로 동남아 호텔 카지노에 진출하는 등 이미 사업 다각화를 시도하고 있다. 카지노 사업을 주요 자금원으로 삼는 일본 야쿠자나 미국·이탈리아 마피아를 닮아가는 모양새다.
김태촌의 양아들이자 범서방파 행동대장이었던 김모(42·구속기소)씨는 사채로 우량기업을 인수한 뒤 회삿돈을 가로채는 '기업형 조폭'의 전형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김태촌 사망에 이은 후계자 구속으로 범서방파의 이런 변신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2010년 이후 폭력조직의 큰 변화 중 하나는 전국구 폭력조직 두목이 대거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진행됐다는 것"이라며 "새로 두목으로 추대된 조직원이 입지를 강화하고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신종 불법 사업에 개입할 가능성도 크다"고 말했다.
dad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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