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 고희동(1886~1965) 50주기(22일)를 맞아 그가 그린 금강산 그림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고희동은 1930년대부터 타계 직전까지 서양화 기법을 도입한 동양화로 금강산을 여러 차례 그렸는데, 미국 컬럼비아대 소장품으로 2013년부터 복원 작업을 해온 ‘진주담도’가 기록으로만 알려지고 실물로는 확인되지 않던 그의 초기 대표작 ‘금강 5제’의 한 점인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 종로구 창덕궁5길 ‘고희동 가옥’에서는 22일부터 ‘한국 근대화단의 선봉, 춘곡 고희동 50주기 특별전’을 열어 금강산 그림 4점을 비롯해 미공개작이 포함된 36점을 전시한다.
■미국으로 건너간 ‘진주담도’
컬럼비아대 소장 ‘진주담도’는 비단에 수묵채색으로 내금강 만폭동의 명승지인 진주담을 그렸다. 작품 오른쪽 아래에 ‘갑술년 여름 춘곡 고희동 그림’이란 서명과 함께 2개의 낙인이 찍혀 이 그림이 1934년작이란 사실을 알려준다. 이 작품은 컬럼비아대 한인학생회가 1930년대 이 대학 동아시아 도서관에 기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70년대까지 벽에 걸려 있다가 훼손돼 수장고에 보관해오다 지난달 2년여에 걸친 복원 작업을 마치고 공개됐다.
고희동은 1930년대부터 타계 직전까지 서양화 기법을 도입한 동양화로 금강산을 여러 차례 그렸는데, 미국 컬럼비아대 소장품으로 2013년부터 복원 작업을 해온 ‘진주담도’가 기록으로만 알려지고 실물로는 확인되지 않던 그의 초기 대표작 ‘금강 5제’의 한 점인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 종로구 창덕궁5길 ‘고희동 가옥’에서는 22일부터 ‘한국 근대화단의 선봉, 춘곡 고희동 50주기 특별전’을 열어 금강산 그림 4점을 비롯해 미공개작이 포함된 36점을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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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비아대 소장 ‘진주담도’는 비단에 수묵채색으로 내금강 만폭동의 명승지인 진주담을 그렸다. 작품 오른쪽 아래에 ‘갑술년 여름 춘곡 고희동 그림’이란 서명과 함께 2개의 낙인이 찍혀 이 그림이 1934년작이란 사실을 알려준다. 이 작품은 컬럼비아대 한인학생회가 1930년대 이 대학 동아시아 도서관에 기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70년대까지 벽에 걸려 있다가 훼손돼 수장고에 보관해오다 지난달 2년여에 걸친 복원 작업을 마치고 공개됐다.
이 그림을 연구한 김성림 미 다트머스대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고희동이 1934년 제13회 서화협회전에 출품한 ‘금강 5제’의 한 점으로 확인됐다”며 “그림의 정확한 제목은 알 수 없지만 동일한 구도의 1940년, 1946년 작품에 ‘진주담도’란 제목이 붙어 있어 ‘진주담도’로 명명했다”고 밝혔다. ‘금강 5제’는 1927년 유화를 접고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한 그가 금강산을 여행한 뒤 남긴 작품으로 기록만 있을 뿐 실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김 교수는 “1934년 10월23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협전(서화협회전) 화보란 제목으로 컬럼비아대 소장품과 같은 그림이 실려 있다”며 “두 작품은 비례나 세부가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했다. 이 그림은 이후에 나온 2점의 ‘진주담도’에 비해 선이 굵고 세부 묘사가 사실적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고희동의 금강산 그림이 모두 종이에 수묵채색인 데 비해 이 작품은 비단에 그렸다는 점이다.
지난달 컬럼비아대에서 ‘고희동과 금강산도’란 논문을 발표한 김 교수는 현재 이 그림의 유통경로를 추적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1920년대에 전 미주 한인학생회가 조직돼 신문을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고, 독립운동 차원에서 한국 문화를 미국에 소개하는 데 적극적이었다”며 “1933년 ‘미스 크레인’이란 미국 여성이 서울 컬럼비아 클럽 등의 후원으로 동아일보에서 풍경화전을 했는데, 고희동의 그림이 이런 경로를 통해 미국으로 건너온 것 아닌가 추정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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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초기 대표작 ‘금강 5제’의 하나로 밝혀진 ‘진주담도’(오른쪽)와 1934년 이 그림이 신문에 실린 모습. |
■고희동과 금강산도
지금까지 확인된 고희동의 금강산 그림은 10점이다. 1940년과 1946년에 그린 ‘진주담도’ 이외에 ‘명경대도’(연도미상), ‘삼선암과 옥류동도’(2폭가리개) ‘삼선암도’ ‘옥녀봉’ ‘유해금강도’(이상 1947년), ‘금강산도’ ‘금강춘색도’(이상 1962년) 등이다. 이번에 확인된 ‘진주담도’가 시대상 가장 앞선 작품이다.
고희동이 금강산 그림을 반복적으로 그린 것은 당시 지식사회의 분위기 때문이다. 빼어나면서 기묘한 풍광으로 불교의 이상향으로 간주됐던 금강산은 고려 후기부터 명승지로 주목받았으며 조선시대 때도 꼭 가봐야 할 곳으로 꼽히면서 심사정, 정선 등 수많은 화가들이 금강산도를 남겼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정기의 상징으로 더욱 각광받았다. 일본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고희동이 서양화 기법을 적용한 동양화로 방향을 바꾸면서 가장 먼저 그림 소재로 삼은 것도 금강산이다.
‘춘곡 고희동 50주기 특별전’ 도록에 ‘고희동과 금강산’이란 글을 쓴 박은순 덕성여대 교수는 “근현대 화가들의 금강산도는 조선에 대한 높은 자부심을 담아내는 가운데 일어난 현상”이라며 “사실의 정확성을 추구한 고희동의 금강산도는 전통성과 민족성, 근대성이 혼성된 작품”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컬럼비아대 소장 그림이 ‘금강 5제’의 한 점이라면 고희동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50주기를 맞아 미술사학자 조은정씨가 쓴 평전 <근대화단을 이끈 고희동>도 발간된다. 지난 8월에는 외손녀인 소설가 최일옥이 쓴 <나의 할아버지, 고희동>이 나왔다. 고희동이 손수 지어 40년간 거주한 고희동 가옥(등록문화재 제84호)은 종로구가 사들여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전시 운영을 맡고 있다. 종로구와 내셔널트러스트는 내년에 이곳을 미술관으로 등록할 계획이다.
<한윤정 선임기자 yjhan@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