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조던을 아는가? 세계 최고의 농구선수. 90년대의 아이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포츠 선수. 이 모든 수식어가 가리키는 사람은 단 한명. 바로 마이클 조던이다.
이런 그도 처음부터 ‘슈퍼스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조력자 나이키가 있었다. 나이키는 오직 조던 만을 위한 시그니쳐 농구화를 제공함은 물론,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해 늘 올바른(?) 해결책이 담긴 CF로 '조던 = 정직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수 있게 도와줬다. 결국 나이키의 노력은 조던을 실력뿐만 아니라 인품까지도 NBA최고로 평가 받을 수 있게 만들었고, 이는 나이키가 업계최고로 올라서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만약, 1984년 조던이 UNC(University of north carolina) 졸업 후 아디다스와 계약을 맺었다면 지금의 나이키는 어떻게 되었을까. 조던은 대학시절까지 아디다스 농구화를 신었기에 분명 아디다스가 조던과 계약 할 확률이 더 높았다(당시 아디다스가 조던과 계약했었더라면 지금 업계 1위는 그들의 것이었겠지?). 하지만 조던을 잡은 것은 아디다스가 아닌 나이키였다. 아니, 아디다스는 조던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당시 나이키 농구 담당 스카우트 ‘서니 비카로’는 나이키를 설득해 조던에게 전폭적인 투자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나이키의 여유자금 50만 달러를 모두 조던에게 투자할 것을 권했다. 당시 NBA에서 1분도 뛰지 않은 신인에게 이러한 파격적인 금액을 제시한 것은 유래가 없던 일. 나이키는 비카로를 믿고 조던에게 5년간 250만 달러를 투자했다.
나이키의 과감한 결정은 성공으로 이어졌다. 평균 28점을 넣고 링을 향해 날아가는 조던과 그의 시그니처 농구화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이는 엄청난 판매고로 이어졌다. 조던이 은퇴하는 날 나이키의 주가가 폭락했고, 조던이 복귀하는 날 다시 큰 폭 상승했으니, 조던이 나이키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 이토록 조던이 나이키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농구화 에어조던(Air Jordan) 시리즈 때문이다.
에어조던 시리즈는 85년 1탄 발매부터 2008년 23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에어조던을 구하기 위해 폭동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에어조던 시리즈의 리트로 버전 발매 날이면 나이키 매장 앞에는 이를 구하기 위한 이들로 장사진을 쳤다. 어디 그 뿐이랴 일명 ‘조단 재테크’를 하기 위한 이들로 제품이 동나 정가의 3~4배 가격이 오르는 현상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에어조던도 처음부터 독자적은 브랜드는 아니었다. 처음엔 나이키 안의 한 농구화 라인에 불과했다.
위대한 서막, ‘에어조던 1‘ (1985)
조던은 1985년 NBA 리그에 입성하면서 처음으로 전용화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에어조던1‘이다. 조던은 ’에어조던 1’을 신고 신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리그 득점 3위, 올스타 선정, 신인왕 수상)의 환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줬다. 덩달아 ‘에어조던 1‘의 인기 역시 치솟기 시작했다. 커다란 용이 꿈틀대기 시작했던 것.
▲ 1985년 흰/빨 컬러가 조합된 화려한 농구화를 신는 선수는 단 한명, 마이클 조던 뿐이었다.
‘에어조던 1’은 기능만 놓고 보면 혁신적인 제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점프력이 높은 조던을 위해 미드솔에 에어를 장착하고 발가락 보호를 위해 토박스 부분에 가죽을 덧대는 등 세심한 부분까지도 배려했던 농구화였다.
나이키 고급화 전략의 일환, ‘에어조던 2‘ (1987)
이탈리아 수제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에어조던 2는 나이키의 유명 디자이너인 브루스 킬고어(Bruce Kilgore)가 디자인한 작품이다.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위해 인조 도마뱀 가죽 패턴을 사용해 단순하고 깔끔했다. 하지만 전작 에어조던 1‘만큼은 주목 받지 못했다. 소비자들은 이런 고급스러운 농구화보단 조던에 걸맞는 혁신적인 제품을 원했기 때문.
▲ '에어조던 2'는 단정한(?) 디자인 때문에 오히려 혹평을 받았다. 그 만큼 전작의 영향력이 엄청났다.
‘에어조던 2‘는 폴리우레탄 미드솔에 에어솔을 장착시켰으며, 뒤꿈치에는 플라스틱 소재의 힐 캡을 적용시키는 등 전작에 비해 기능은 향상됐다. 조던은 이 신발과 함께 한 시즌 득점왕과 슬램덩크 챔피언을 거머쥐었다.
틴커 햇필드의 등장, ‘에어조던 3’ (1988)
‘에어조던 3’는 에어조던 시리즈 중 가장 사랑 받았던 모델 중 하나다. ‘에어조던 3‘는 나이키 디자이너 틴커 햇필드(Tinker Hatfield)의 데뷔작이기도 한데, 그는 이 농구화의 성공에 힘입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 '에어조던 3'는 틴커 햇필드를 스타 디자이너로 만들어 줬다.
‘에어조던 3’는 조던 시리즈 중 최초로 미드컷으로 제작된 농구화다. 또한 뒤축에는 에어가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비지블 에어솔(투명 에어)이 쓰였으며 화려한 코끼리패턴으로 되어있다. 조던은 에어조던 3와 함께 시즌 득점왕, 수비왕, mvp, 올스타 mvp, 슬램덩크 챔피언을 수상하며 리그를 장악하는 지배자로서의 면모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서히 이빨을 드러낸 조던의 ‘에어조던 4’ (1989)
에어조던 4 역시 햇필드의 작품. 에어조던4는 전작과 비슷한 디자인과 내구성 결함으로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에어조던 4는 포근한 착용감이 인상적인 농구화였다. 하지만 가루처럼 부서지는 가수분해 현상과 도색 처리 된 중창의 페인트가 갈라지며 벗겨지는 등 내구성에서 다소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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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에 비해 크게 달라진 점이 없는 '에어조던 4'를 보고 팬들은 실망했지만, 조던은 '에어조던 4'와 함께 자신의 존재를 완벽히 부각시켰다.
조던은 이 신발을 신고 5년 연속 올스타, 3년 연속 득점왕을 거머쥐었다. 에어조던 4는 조던이 클리블랜드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결정지은 '더 샷' 장면의 주인공이라 팬들의 기억 속에 더 깊이 각인되어 있는 모델이기도 하다.
다시 화려해진 디자인의, ‘에어조던 5’ (1990)
일명 ‘서태웅 신발’인 에어조던 5 역시 틴커 햇필드의 작품이다. 미국의 프로펠러 전투기인 머스탱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되었다. 빛을 받으면 발광하는 스카치 소재가 농구화에 처음으로 쓰였고, 미드솔의 불꽃무늬가 강인한 인상을 풍긴 농구화였다. 어퍼에 쓰인 투명한 플라스틱 메시와 아웃솔에 쓰인 클리어창은 깔끔한 느낌과 디자인적 완성도를 높여주었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누렇게 변색되어 아쉬움을 남겼던 농구화이기도 하다.
▲ 강렬한 불꽃무늬, 흰/검/빨 3컬러의 조화. 누가봐도 '에어조던 5'는 화려했다.
이 해 조던은 6년 연속 올스타, 4번 연속 득점왕, NBA 퍼스트팀, NBA 수비 퍼스트 팀 등 리그를 완전히 지배하는 포스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점에 오르기 위한 마지막 퍼즐 조각인 리그 우승을 디트로이트에게 빼앗긴 아픈 추억을 함께 한 신발이기도 하다.
조던의 첫 우승과 함께한, ‘에어조던 6’ (1991)
'에어조던 6'은 서태웅이 아닌 강백호의 신발. 일본 애니메이션 건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포르쉐 자동차의 리어 스포일러에서 따온 힐캡과 가볍고 얇은 스판 재질의 설포가 장착된 것이 특징이다. 에어조던 8까지 이어지는 원형패턴의 아웃솔은 이 시리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감격스러운 첫 우승의 순간에 조던과 함께한 농구화가 바로 '에어조던 6'다.
이 신발을 신고 조던은 5연속 리그 득점왕, 7년 연속 올스타, 리그 MVP를 수상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농구화와 함께 조던이 드디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되었다는 것이겠지?
내장형 에어솔의 시작, ‘에어조던 7’ (1992)
이제는 조던 전문 디자이너가 된 틴커 햇필드는 우연히 거리를 지나다가 아프리카 음악 포스터를 발견하고 그에 영감을 얻어 화려한 디자인의 '에어조던 7'을 만들었다. 에어조던7은 이전 모델들에 비해 간결하고 가벼워졌다. 또한 '에어조던 7'을 시작으로 뒷축에 보이던 비지블 에어솔(투명 에어)은 사라지고 중창 안으로 모습을 감춘 내장형 에어솔을 사용하게 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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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한 직선 디자인의 '에어조던 7'은 내장형 에어솔의 시작을 알린 농구화다.
이 신발과 함께 한 조던은 6연속 리그 득점왕, 올 NBA 퍼스트팀, 수비 퍼스트팀, 리그 MVP를 수상하였으며 두 번째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되었다. 또한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맹활약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뻔한, ‘에어조던 8‘ (1993)
'에어조던 8'을 신고 경기 하던 92-93 시즌은 조던의 최고 전성기였다. 먼저 에어조던 8은 원형무늬 아웃솔, 허라치핏 등 에어조던 7의 컨셉트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농구화로서의 기능성을 더 발전시킨 모델이다. X자 모양의 크로스 스트랩을 채용해 발 전체를 잡아주도록 했다.
▲ '에어조던 8'은 어쩌면 조던의 마지막 농구화가 될 뻔 했다.
그러나 더 무거워지고 답답해진 신발구조 탓에 조던은 발에 무좀이 걸리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물론 무좀이라는 사소한(?) 그 고통을 감내한 결과 리그 3연속 우승이라는 가장 큰 업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런데 정작 중요한 사건은 따로 있었다. 바로 조던의 아버지가 차량강도 사고로 인해 사망하게 된 것. 갑작스런 소식에 조던은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에어조던 8’은 어쩌면 마지막 에어조던 시리즈가 될 뻔 했었다.
주인 없는 비운의 농구화, ‘에어조던 9’ (1994)
리그 시작 한 달을 앞두고 돌연 은퇴한 조던 때문에 에어조던 9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를 기리는 의미로 야구계에 진출한 조던이 야구화로 개조한 에어조던 9을 직접 착용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야구화 '에어조던 9'의 모습은 농구 코트 위에서의 그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팬들에게는 어색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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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던의 돌연 은퇴로 '에어조던 9'은 주인을 잃어버렸다.
이 때 나이키는 에어조던 9의 아웃솔에 그의 기록들을 세계 각국의 언어로 새기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던의 컴백 농구화, ‘에어조던 10’ (1995)
‘그가 돌아왔다’ 바로 1995년 3월 19일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시카고 불스의 경기에서 말이다. 그의 컴백만으로도 전세계의 수많은 팬들은 흥분하고 환호했다. 컴백 후 그가 착용한 농구화는 에어조던 10. 스카티 피펜이 방송에서 에어조던 10을 보여주며 포즈를 취하는 모습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하는 명장면(?) 이기도 하다.
▲ 조던의 컴백경기. '에어조던 10'을 착용하고 경기에 다시 나선 조던의 모습만으로도 이 농구화는 큰 주목을 받았다.
'에어조던 10'은 파일론을 사용해 무게가 가벼워지고, 전장 에어솔로 뛰어난 쿠셔닝의 농구화였다.
역사상 최고의 농구화로 평가받는, ‘에어조던 11’ (1996)
1996년 조던은 시즌 도중 에어조던 10에서 11로 바꿔 신으면서, 10번째 올스타 선정, 2번째 올스타 MVP, 8번째 리그 득점왕, 리그 우승, 리그 MVP 라는 큰 업적을 이뤘다.
'에어조던 11'의 기능이 탁월해서 일까? 최고의 기록을 낸 조던과 그의 농구화는 인기 역시도 역대 최고였다. 구두 광이 나듯 반짝이는 에나멜 가죽에 파일론 중창, 전장 에어솔, 카본 스프링 플레이트, 스피드 레이싱 등의 모두 마음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리트로 버전은 발매하자마자 품절되고, 심지어는 구매하기 위한 이들끼리 몸싸움(?)을 벌이기도 한 농구화다.
▲ '에어조던 11'은 조던하면 가장 떠오르는 농구화다.
'에어조던 11'에는 또 하나의 큰 의미가 있다. 바로 이 제품의 큰 성공으로 인해 조던브랜드가 독립법인으로 설 수 있었던 것. 어떤 의미에서 ‘에어조던 11‘은 나이키 조던시리즈의 마지막 제품이기도 하다.
글/ 주태환
편집/선우윤 기자 sunwoo@i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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