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기계설비학과 대학생이던 배정준(39) 정준산업 대표는 우연히 교내에 붙은 중소기업청 주관 '창업경연대회' 공고를 봤다. 창업할 만한 아이템이 뭐 없을까. 궁리하던 배 대표의 귀에 예전 '그 소리'가 들렸다. '아야, 아야' '어휴, 어휴'. '아야'는 아파하는 할머니의 신음이고, '어휴'는 용을 쓰는 아버지의 한숨이었다.
배 대표의 할머니가 수년 전 92세로 별세하기 전까지 할머니의 목욕은 아버지 배향섭(73) 정준산업 사장이 매주 직접 했다. 4남1녀의 셋째 아들인 배 사장은 '어머니의 목욕은 내 손으로 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동이 불편한 모친을 이리저리 옮기며 때를 미는 것은 성인 남성에게도 힘이 부치는 일이었다. 게다가 흔히 사용하는 때수건은 힘을 줘도 쉽게 때가 밀리지 않아 나이 든 모친의 피부가 벌게질 정도로 힘을 줘야 했다. 궁리 끝에 목장갑 손바닥에 때수건을 붙여 보기도 했으나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때밀이 소동을 떠올린 배 대표는 "때장갑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와 아버지 생각하다 발명
할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때장갑으로 배 대표는 그해 창업경진대회에서 대구·경북 지역 1등을 차지했다. 원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힘주지 않아도 각질을 잘 벗겨 내도록 가느다란 천연 섬유를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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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밀이계의 명품 ‘때르메스’를 만드는 직원들이 지난 21일 대구 달서구 공장에서 여러 색깔의 때장갑을 끼고 손을 흔들고 있다. 앞쪽에 선 이는 배정준 대표. 때르메스는 뻑뻑한 때수건으로 힘겹게 할머니를 목욕시키던 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린 배 대표의 작품이다./김종호 기자 |
배 대표의 할머니가 수년 전 92세로 별세하기 전까지 할머니의 목욕은 아버지 배향섭(73) 정준산업 사장이 매주 직접 했다. 4남1녀의 셋째 아들인 배 사장은 '어머니의 목욕은 내 손으로 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동이 불편한 모친을 이리저리 옮기며 때를 미는 것은 성인 남성에게도 힘이 부치는 일이었다. 게다가 흔히 사용하는 때수건은 힘을 줘도 쉽게 때가 밀리지 않아 나이 든 모친의 피부가 벌게질 정도로 힘을 줘야 했다. 궁리 끝에 목장갑 손바닥에 때수건을 붙여 보기도 했으나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때밀이 소동을 떠올린 배 대표는 "때장갑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와 아버지 생각하다 발명
할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때장갑으로 배 대표는 그해 창업경진대회에서 대구·경북 지역 1등을 차지했다. 원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힘주지 않아도 각질을 잘 벗겨 내도록 가느다란 천연 섬유를 쓴 것이다.
전문 서적을 뒤지고 관련 단체를 돌던 배 대표는 직물협회에서 러시아산 자작나무를 발견했다. 조직이 탄탄해 가늘면서 쫀쫀한 실을 뽑아내는 데 적합했다. 머리카락 굵기의 30분의 1로 뽑아낸 극세사를 꼬고, 꼬인 극세사끼리 다시 꼰다. 이렇게 해야 물에 넣어도 수축률을 최소화할 수 있다. 여러 번의 실험 끝에 30가닥을 150번 꼬아 만들어 지금의 때장갑이 나왔다.
배 대표는 1999년 경진대회 1등 기록에 힘입어 경북테크노파크에 입주한다. 정준산업의 시작이다. 아이디어는 배 대표가 냈으나 실무는 아버지 배 사장이 주로 맡았다. 배 대표가 원래 붙인 이름은 '요술 때밀이 장갑'이다. '요술' 단어는 상표권도 얻었다. 꼰 실 여러 가닥을 다시 꼬는 복합연사(複合連絲) 가공법과 원단에 대해 특허를 각각 취득했다.
요술 때장갑을 내놓자마자 바로 불티나듯 팔린 것은 아니다. 하루 5개 판매가 평균이었고 20개 팔던 날은 춤을 추고 싶을 정도였다. 최초 구매자는 한 수녀였다. 간병인들 교육에 필요하다며 사갔다. 간병인에게는 힘이 덜 들고, 환자는 덜 아픈 목욕용품은 병원과 요양원에서 먼저 반겼다.
요양 시설이 늘면서 조금씩 증가하던 매출이 미용 관련 커뮤니티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 한꺼번에 수백 건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중국·대만·미국·호주에까지 소문이 건너갔다. 교포들이 "우리에게도 보내달라"며 시차(時差)도 생각지 않고 전화를 걸어와 견디다 못한 배 사장이 아예 전화기를 꺼놓기도 했다.
짝퉁이 골치… 협력 공장에서 베끼기도
한 달 매출 20억원이 넘으며 때장갑에는 '때르메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프랑스 명품 에르메스(Hermes)처럼 고급스러운 때장갑이라는 뜻이다. 양손 한 세트가 6000원으로 일반 때수건의 30배다. 때르메스로 밀면 밀려나오는 때는 보이지 않는다. 때를 가루로 분쇄하기 때문이다. 대신 '때푸치노'가 생긴다. 장갑을 물에 흔들면 붙어 있던 때와 각질이 뿌옇게 물에 불어나와 우윳빛이 도는데, 그 색깔이 카푸치노 같다고 붙은 이름이다.
에르메스가 프랑스 공방에서 수작업으로 한 땀 한 땀 제작하듯 때르메스도 대구 공장에서 하나씩 손으로 검수하고 포장해서 만든다. 대구 달서구 정준산업 공장을 지난 21일 찾아갔다. '드르륵 드르륵 찍찍 드르륵~'. 330㎡(100평) 남짓한 지하 공장에 들어서자 금속성 기계 소음이 먼저 기자를 맞았다.
직조 기계 35대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쉬지 않고 돌아간다. 한쪽 탁자에서는 직원 6명이 어른 허리 높이만큼 쌓인 때장갑을 하나씩 들여다보고 있다. 염색을 마친 장갑을 들여다보며 실밥을 정리하고, 장갑 안에 안내설명서를 넣고 말끔히 포장하는 것까지가 이들의 몫이다.
분홍 장갑 외에도 파랑 발 전용 장갑이 있다. 폴리에스테르로 만들어 거칠고 억센 발 전용은 '꼼짝마 장갑'으로 불린다. 손에서 미끄러지는 생선을 잡기에 수월하다고 낚시터와 횟집에서 많이 찾아 붙은 별명이다.
때르메스의 발목을 잡는 건 유사 제품이다. 민사소송 중인 '짝퉁'이 6종류다. 제작을 맡겼던 협력 업체에서 기술을 그대로 빼내 파는 것도 있고, 믿었던 판매업자가 이름만 바꾼 것도 온라인에서 버젓이 팔린다.
연내에 때르메스의 동생 격인 고무장갑이 나올 예정이다. 배 대표는 "손에 달라붙어 잘 벗겨지지 않고 쉽게 흘러내려 불편한 점을 보완한 제품"이라며 "주변의 사소한 어려움이라도 놓치지 않는 아이디어 제품을 계속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대구=신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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