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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이정희 전 공동대표가 8일 당권파(현재는 구 당권파) 주도로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보고서 재검증 공청회에서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
"저는 죄인입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전무후무한 '막장 드라마'를 연출한 통합진보당 폭력사태가 벌어진 다음날인 13일 오전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는 트위터에 이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이 전 공동대표는 "어제 제가 무릎 꿇지 못한 것이 오늘 모두를 패배시켰습니다. 이 상황까지 오게 한 무능력의 죄에 대해 모든 매를 다 맞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당내 갈등의 와중에 계파 이익을 지키는 데만 급급한 모습으로 일관함으로써 촉망 받던 '진보의 아이콘'에서 한순간에 '퇴보의 아이콘'으로 전락한 이 전 공동대표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이번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 이 전 공동대표는 대중적 이미지를 지닌 몇 안 되는 진보 정치인이었다. 2008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해 2010년 당 대표 자리에 오르며 '뚝심' 있는 여성정치인으로서 이미지를 굳혔다.
이 전 공동대표를 두고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못지않은 야권의 거물로 성장할 것"이라는 말도 많았다. 정직, 원칙, 강단, 성실이 그의 이미지였다.
이 전 공동대표는 서울 봉천동 달동네에서 태어났다. 두부를 만들어 생계를 꾸린 아버지 밑에서 평범하게 자랐다.
이 전 공동대표를 따라다니는 '학력고사 수석' 꼬리표는 1987년 달았다. 서문여고 2학년 때까지 전교 10등 안팎의 성적을 유지하던 그는 3학년이 되면서 '미친 듯이 해보자'며 공부에 몰입했다. 그해 대학입학학력고사에서 인문계 전국 여자 수석을 차지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 87학번으로 입학했다.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며 대학 3학년 때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이듬해 서울대 총여학생회장이 됐다. 1992년 윤금이씨가 주한미군에 살해된 사건이 벌어지자 변호사가 돼 해법을 찾고 싶다면서 대학 졸업 후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이 전 공동대표는 2007년 3월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 4월 치러진 18대 총선 때 비례대표 3번 공천을 받아 여의도에 입성했고, 그 후로 탄탄대로를 달렸다.
이 전 공동대표는 2010년 헌정사상 최연소 여성 당대표(당시 만 41세)라는 기록을 세웠다. 현재 통합진보당 구 당권파 세력(구 민주노동당 당권파)의 지지를 업고 민주노동당 당대표에 올라 촉망받는 여성정치인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유연한 진보'를 내세운 그는 단숨에 야권의 '차세대 리더'가 됐다.
앳되고 연약한 겉모습과 달리 그는 강인하고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 한진중공업 사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 등 사회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몸을 던지는 자세를 보여줬다. 특히 2009년 국회에서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를 온몸으로 막다가 한나라당 여성의원들에게 끌려간 일화는 유명하다.
이 전 공동대표는 '온몸을 던지는 순정파' 정치인으로 대중의 호감을 샀다. 2010년에는 차세대 여성리더 300인 중 1위에 올랐고, 2011년에는 트위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1위에 올랐다.
진보 정치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화려한 정치 활동을 펼쳐온 이 전 공동대표는 이번 '부정선거 사태'에서 구 당권파를 위해 온몸을 던지며 하루아침에 추락했다.
통합진보당은 지난해 12월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 민주노총 등이 뭉쳐서 탄생했다. 지난해 진보진영의 내부 비판에도 이 전 공동대표는 국민참여당과 통합을 밀어붙여 통합진보당 탄생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 전 공동대표의 명성에 처음 흠집이 생긴 건 지난 4ㆍ11총선 야권연대 경선에서 여론조사 조작 의혹이 불거졌을 때다. 그는 사퇴 대신 재경선을 하겠다고 버텼지만 여론의 거센 압박에 물러났다. 당시 이 전 공동대표는 "부끄럽고 죄송하다. 가장 낮고 힘든 곳에서 헌신 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 선거 파문이 불거지자 이 전 공동대표는 숨겨온 '민낯'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통합진보당 사태를 촉발시킨 구 당권파 세력의 선두에서 진상조사위 조사 결과를 반박하는데 앞장섰다. 구 당권파가 지난 8일 개최한 '검증 청문회'에선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당권파의 주장을 밀어붙였다.
이 전 공동대표는 비례대표 부정 선거 의혹이 제기된 이후부터 말 바꾸기와 생떼쓰기로 일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 당권파의 이익을 대변하며 의장직 사퇴를 번복했고,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진다면서 진상조사는 수용할 수 없다고 입장을 번복했다. 그는 "재조사가 없다면 당내 화합이 힘들 것"이라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통합진보당 사태가 정점에 이른 12일에도 "이정희는 마지막까지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 전 공동대표는 폭력사태로 심화된 중앙위원회 회의 직전 공동대표직 사의를 밝히고 회의장을 떠났다. 당 안팎에선 그가 마지막 카드인 사의 표명마저 계파를 위해 꼼수를 부린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이 전 공동대표가 사퇴한 것은 비행기 폭파범이 중간 기착지에서 내리는 것"이라면서 이 전 대표를 비난하기도 했다.
통합진보당 사태가 처음 불거져 나온 지 불과 보름 만에 이 전 공동대표는 회복할 수 없는 내상을 입었다. 이 전 공동대표를 소통의 아이콘으로 만들어준 트위터 민심마저 모두 돌아섰다.
소셜네트워트서비스(SNS) 여론분석업체 소셜트리에 따르면 지난 13일 하루 트위터에서 '이정희'를 언급한 2만 4,860개의 트위트 내용 중 이 전 공동대표를 비판하는 트위트가 8,791개에 달했다.
13일 트위터에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올린 것을 끝으로 이 전 공동대표는 15일 현재까지 침묵하고 있다. 진보정치를 수십 년 퇴보시키는 데 앞장섰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그이기에 적어도 개혁ㆍ진보 성향의 유권자들에겐 그는 '죄인'이 분명한 듯하다.
한국아이닷컴 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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