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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BEST] 내 아파트로 리모델링 실험 … 다녀간 친구들 “우리집도 … ”

중앙일보 박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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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0 다시 세상으로 - 결혼 7년 만에 인테리어 디자이너 변신 조희선씨
1 전업주부 출신 인테리어 디자이너 조희선씨는 스스로를 “실용성을 추구하는 생활밀착형 디자이너”라고 말했다. “사람이 활동할 수 있는 최소 동선 거리, 90㎝를 우선적으로 고려해 공간을 디자인한다”며 “아무리 보기 좋아도 최소 동선 거리를 무시하면 생활하기 불편하다”고 설명했다. 사진은 서울 합정동 ‘꾸밈by조회선’ 사무실에서 찍었다. [사진=박종근 기자]

1 전업주부 출신 인테리어 디자이너 조희선씨는 스스로를 “실용성을 추구하는 생활밀착형 디자이너”라고 말했다. “사람이 활동할 수 있는 최소 동선 거리, 90㎝를 우선적으로 고려해 공간을 디자인한다”며 “아무리 보기 좋아도 최소 동선 거리를 무시하면 생활하기 불편하다”고 설명했다. 사진은 서울 합정동 ‘꾸밈by조회선’ 사무실에서 찍었다. [사진=박종근 기자]

1 전업주부 출신 인테리어 디자이너 조희선씨는 스스로를 “실용성을 추구하는 생활밀착형 디자이너”라고 말했다. “사람이 활동할 수 있는 최소 동선 거리, 90㎝를 우선적으로 고려해 공간을 디자인한다”며 “아무리 보기 좋아도 최소 동선 거리를 무시하면 생활하기 불편하다”고 설명했다. 사진은 서울 합정동 ‘꾸밈by조회선’ 사무실에서 찍었다.[사진=박종근 기자] 4060 다시 세상으로 육아와 내조, 그리고 살림에 ‘올인’하며 살아온 주부들. 마흔이 넘어서면서 삶의 고민이 커진다. 남편도, 자식도 옆에 있지만 내 존재를 대신 증명해 주진 않는다. 그렇다고 쇼핑으로, 모임으로 시간을 보내버리기엔 삶이 너무 길다. 그 고민에 대한 답을 늦깎이로 일을 찾아 ‘성공한 프로’로 자리잡은 여성들에게 들어본다. 새로운 길을 열망하는 ‘4060’에게 롤 모델이 될 여성들이다.

짧은 직장생활을 뒤로하고 일본으로 인테리어 공부를 하러 떠날 결심을 했던 스물다섯 당찬 여자. 사랑에 빠져 유학 대신 결혼에 골인, 꼬박 7년을 전업주부로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았지만 인테리어에 대한 열망은 꺼지지 않았다. 신혼집을 꾸미며 독학으로 인테리어 디자인을 공부했던 그가 이젠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배우 김명민·이승연·김보연·이범수·윤유선·송윤아, 개그맨 김태균·박성호·박미선 등이 그에게 집 꾸미기를 의뢰한 사람들이다. ‘꾸밈by조희선’의 조희선(44) 대표를 만나 감각 있는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변신한 이야기를 들었다.

글=문은영 객원기자

 -언제부터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대학 시절부터다. 친구들이 옷 구경을 할 때 나는 원단시장을 둘러보는 게 좋았다. 철마다 방 커튼이며 테이블보를 수시로 바꾸며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인테리어와는 거리가 먼 수입자동차 딜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벤츠코리아에 입사했다. 하지만 내가 매진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2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얼까’ 고민 끝에 인테리어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일본 도쿄디자인전문학교에 지원해 1993년 4월 학기에 입학하기로 했는데, 92년 12월 퇴사할 무렵 남편을 만나게 됐다. 그런데 만날수록 좋아져서 유학을 포기하고 93년 5월에 결혼했다.”

 -결혼 후 왜 전업주부로만 지냈나. “벤처 캐피털리스트로 일하는 남편은 아주 보수적인 사람이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남편은 ‘아이들이 클 때까지는 아이들에게 전념해라. 그 다음엔 일을 갖는 것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오로지 아들 둘 키우는 일에만 전념하고 살았다. 대신 사그라지지 않는 ‘인테리어 본능’을 집에 맘껏 풀어놓았다. 막상 집을 꾸미려고 보니 아는 게 너무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인테리어 자재상들이 몰려 있는 논현동과 을지로를 다니며 정보를 구하고 공사를 의뢰하며 인테리어 공부를 했다. 또 국내외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여행 중에도 숙소 인테리어를 눈여겨보고 인테리어 숍들을 찾아다녔다. 또 그 나라의 인테리어 잡지들도 사서 스크랩하며 공부를 계속했다.”

2, 3 조희선씨가 고친 집 모습. 흔히 TV를 놓는 공간에 소파를 배치, 공간 활용에 대한 선입견을 깬 거실(사진 2)과 나무 바닥재로 아트월을 만든 거실(사진 3)이다. [중앙포토]

2, 3 조희선씨가 고친 집 모습. 흔히 TV를 놓는 공간에 소파를 배치, 공간 활용에 대한 선입견을 깬 거실(사진 2)과 나무 바닥재로 아트월을 만든 거실(사진 3)이다. [중앙포토]

2, 3 조희선씨가 고친 집 모습. 흔히 TV를 놓는 공간에 소파를 배치, 공간 활용에 대한 선입견을 깬 거실(사진 2)과 나무 바닥재로 아트월을 만든 거실(사진 3)이다.  -눈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시공하는 것은 다른데, 어떻게 인테리어 실무를 익혔나. “내 집을 고치는 것이 처음 시작이었다. 결혼 후 7년간 살았던 신혼집은 22평형 아파트였다. 인테리어는 쉴 새 없이 변신을 거듭했지만 구조에 손을 대는 리모델링은 감히 생각도 못했다. 그러다 결혼 7년차에 40평형대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내가 원하는 그림대로 집을 완성하려면 내가 똑똑해져야겠다’ 생각하고, 1년 동안 건축 시장을 돌면서 쓰고 싶은 자재의 특성과 시공상의 문제를 하나하나 공부했다. 그리고 시공 기술자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관리·감독해서 드디어 내 공간을 만들었다. ”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내 집을 리모델링한 것을 보고 지인들이 하나 둘 집을 꾸며달라는 의뢰를 해왔다. 간단한 소품 작업부터 시작했다. 2000년 큰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이 일이 업이 될 줄은 몰랐다. 한 달에 100만원만 벌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이너스 100만원이 되는 달도 많았다. 고객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욕심을 많이 냈기 때문이다. 돈을 못 버는 건 차치하고, 현장에서 시공 기술자들과 부딪치는 일도 다반사였다. 무명의 새내기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는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아 공기에 떠밀려 철야작업을 하는 일도 많았다. 중밀도섬유판(MDF) 알레르기가 있어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온 날은 온몸에 발진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일이 너무 좋았다. 고생 끝에 집이 완성되고 주인이 입주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후배들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좋으면 그게 네 일이고 싫으면 네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잡지에서도 ‘조희선’이란 이름은 유명하다. “2004년 ‘여성중앙’에서 우리 집 아이들 방을 촬영해 갔는데, 2006년 담당기자가 갑자기 연락을 해왔다. ‘조희선의 살림의 지혜’라는 칼럼으로 연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잡지 경험이 없는 내가 어시스트도 아닌 메인 코디네이터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됐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운이 좋았다. 그 후 한 달도 쉬지 않고 ‘여성중앙’ ‘행복이 가득한 집’ ‘메종’ ‘레몬트리’ ‘리빙센스’ 등 여러 잡지에 내 작업을 소개하고 있다.”

 -홈쇼핑 판매용 침구 디자인도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가. “지난해 ‘라 메종 드 조희선’이란 브랜드를 론칭해서 홈쇼핑 판매를 시작했다. 회사 경영을 직접 하는 것은 아니고 디자이너로서 협업을 하고 있다. 2004~2006년 아이들이 호주 멜버른으로 어학연수를 갔다. 그 2년 동안은 일에 날개를 단 시간이었다. 새벽에 나가 새벽에 돌아오는 강행군을 하느라 깨어 있는 시간에 남편 얼굴을 보지도 못할 정도로 빵점짜리 아내였다. 하지만 아이들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100점은 못 되어도 80점은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시간을 만들까 궁리 끝에 변호사들이 모여 로펌을 만들 듯 프로젝트 프리랜서 그룹을 만들기로 했다. 2008년 생각이 같은 임종수·전선영 실장과 함께 사무실을 내고, ‘꾸밈by조희선’이란 울타리 안에서 따로 또 같이 작업하고 있다. 그렇게 시간을 벌어놓으니 디자인 작업과 잡지 칼럼 기고, 촬영, 강의, 방송 출연, 그리고 컨설팅까지 다양한 분야로 일을 넓혀 나갈 수 있었다.”

 -나, 조희선의 브랜드 가치를 키우는 비결은 무엇인가. “2000년 처음 일을 시작할 때부터 ‘꾸밈by조희선’이란 브랜드로 명함을 만들었고, 돈을 많이 벌기보다는 경력을 쌓고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작업에 신경을 썼다. 그런 면에서 콘텐트의 가치에 대해 남들보다 빨리 알았던 것 같다. 한 집씩 작업이 끝날 때마다 사진가를 따로 섭외해 자료 사진을 촬영했다. 또 포털사이트에 카페를 만들어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각 공간의 스토리를 기록했다. 그렇게 쌓은 콘텐트를 모아 『홈 디자인 스토리』 『스타들의 내집 같은 전셋집』 등의 책도 펴냈다. ”

 -일이 남편과 아이들에게 미친 영향은. “일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명문대 입학, 대기업 취업이 삶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구나, 아이의 올바른 생각을 만들어 주는 게 우선이구나’ 깨달았다. 만약 내 성격에 전업주부로만 살았다면 지금쯤 고3, 중3인 아이들을 ‘잡고’ 명문대 진학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도에 지나치지 않으면 공부나 복장에 대해 잔소리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들과 더 많이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과의 사이도 훨씬 가까워졌다. 보수적인 남편도 많이 변했고 많이 편해졌다.”

 -내 일을 갖고 싶어 하는 전업주부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관심 분야가 있다면 적어도 주 2회는 나를 위해 찾아다니며 공부하고 재투자하는 시간을 가져라. 그게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밑천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내공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리고 성과에 대한 피드백을 너무 빨리 기대하지 마라. 열정적으로 일에 집중하다 보면 보수나 평판은 뒤따라온다. 또 하나, 일을 시작할 때 가족들에게 갖게 되는 죄책감에 대해선 ‘참고 기다리라’고 말하고 싶다. 나도 둘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가 학교 와서 청소해 주지 않아 속상하다’고 말하는 걸 듣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엄마, 나 나가도 돼? 엄마 나 뭐 먹어?’ 쉴 새 없이 전화해대던 둘째도 중학생이 되더니 조금씩 달라졌다. 엄마가 바쁘게 생활하는 사이에도 아이들은 인성을 갖추며 커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 아빠 두 사람 사이만 문제없으면 아이들도 특별히 따로 시간 내서 인성교육 하지 않아도 저절로 보고 배운다.”

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박종근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jokepark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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