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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죽방 날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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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밥만 먹자. 이야기는 밥 먹고 커피 마시면서 하자. 밥 먹을 때 말하면 죽밤!” 부부간의 대화를 요약한 이 말에 나오는 죽밤이 대체 뭔가? 알 수 없고 궁금해서 1주일 전에 내 주변의 비교적(?) 젊은 사람들에게 뜻을 물어보고 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뜻을 제대로 아는 경우가 드물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죽밤이 아니라 죽방이 맞는데, 표기가 잘못돼 있어 더 헷갈린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죽밤을 ‘죽도록 맞아서 밤탱이’라는 뜻일 거라고 해석했다.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그런데 설마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도록 아내를 때리는(때릴 수 있는) 젊은 남편이 있을라구? 농담이야 물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좀 그건 아닌 것 같다. 20대 여성 하나는 뜻을 모르겠어서 중학교 교사인 친구에게 부탁해 아이들의 유권해석을 받아달라고 했다. 결론은 죽밤이 아니라 죽방이 맞다는 ‘보고’였다.

다른 20대 여성은 죽방 날린다는 뜻일 거라고 풀이하면서 “밥 먹을 때 말하면 얼굴 볼 쪽을 때린다는 거 아니겠느냐?”고 했다. 이 해석이 정답에 가장 가까운 것 같았다. 실제로 인터넷에 떠 있는 글들을 검색해 보니 다 그런 용도로 쓰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기가 반에서 점점 찐따(덜 떨어진 남자라는 뜻으로, 왕따와 비슷한 의미)가 돼가고 있다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초등학생의 상담에 대해 선빵을 날려라(먼저 때려라), 죽방 날리라고 코치하는 글이 눈에 띄었다. ‘그때는 그냥 책상 빡 차고 죽방 한 대 갈기세요. ㅎㅎ. 그러면 선빵 맞은 애가 놀라서 울 거예요. 아마 그러면 그 새끼가 이제 찐따 되는 거??ㅋ.’

어떤 중학생(으로 보임)이 쓴 글은 조금 뉘앙스가 다른 것 같았다. 그 글은 “너 이번 시간 끝나고 당장 옥상으로 올라와”라는 말과 함께 이쁘다고 침을 질질 흘리던 주위 남자들에게 상콤살벌한 죽방을 한 대씩 갈기고는....이렇게 돼 있다. 여기서 날리는 죽방은 남을 아프게 하기보다는 경고와 설득의 의미를 담은 것 같았다.

죽방이라는 말은 죽빵으로도 표기한 경우가 많았다. 최근 큰 인기를 끈 TV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도 이 말이 나온다. 지난해 12월 19일 방영분에서 천송이(전지현)가 “좋냐? 나 빵점 주고 망신 주고 그러니까 좋아? 내가 봤을 땐 넌 찌르면 퍼런 피가 나올 놈이야.”라며 “이런 자선냄비에 씹던 껌 같은 새끼!”라고 욕을 퍼부었다. 이어 “왜 너만 조선 욕 하냐? 나도 한다. 이런 병자년에 죽빵을 날릴...”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욕에 왜 병자년이 나오는지는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여간 이때부터 죽방(또는 죽빵)이라는 말이 더 자신 있게 퍼지게 된 것 같은데, 나이든 사람들만(사실은 나만?) 그걸 모르고 있었다. 죽방은 다른 사람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10~20대의 은어라고 풀이한 자료가 있다. 죽방을 방죽이라고 잘못 알고 쓰쓴 경우도 있던데, 어쨌든 그런 은어라면 나이 든 사람들이 알 수가 없지.

이렇게 다양하고 해괴한 은어를 쓰는 아이들은 대부분의 경우 어른들의 말을 알아듣는데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알아듣기는커녕 무슨 외계어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손해 보는 느낌도 들지만 어쩌겠는가. 10~20대의 감수성이 세상을 끌어가는 판이니 최대한 알려고 노력이나 하는 수밖에. 하지만 죽방의 어원은 끝내 알 수가 없었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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