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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슬픈 수컷

조선일보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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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에 사는 도칫과(科) 생선 뚝지는 심통맞게 생겨서 흔히 심퉁이로 불린다. 못생겼어도 수컷은 회, 암컷은 알탕으로 인기있다. 요즘 산란철에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나면 수컷은 40일 동안 아무것도 안 먹고 알을 지킨다. 풍선 같은 배를 뒤집고서 알량한 지느러미를 흔들어 알에 산소를 부채질한다. 새끼들이 부화하면 기력이 다한 수컷은 몸이 너덜너덜 해진 채 숨진다. '바다의 가시고기'라 할 부성애(父性愛)다.

▶귀뚜라미 수컷은 짝짓기 한 뒤 암컷을 지겹게 따라다닌다. 암컷 몸에 넣은 정자 주머니를 다른 수컷이 빼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얼마 전 영국 엑시터대 연구팀이 3년 추적 끝에 기존 학설을 뒤집었다. 수컷이 스토킹하는 암컷은 천적인 새와 쥐의 공격에서 살아남는 확률이 홀몸 암컷보다 여섯 배나 높았다. 반면 암컷을 따라다니는 수컷 생존율은 독신 수컷 4분의 1밖에 안 됐다. 목숨 걸고 암컷을 지키는 기사도(騎士道)인 셈이다.


▶곤충과 새 중엔 암컷에게 먹이를 선물로 바쳐 환심을 사는 수컷이 많다. 나아가 제 몸까지 바치기도 한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가 파나마 열대우림에서 민벌레를 관찰했다. 수컷은 구애를 하면서 머리에 난 구멍을 암컷에게 내밀었다. 암컷은 구멍 속 액체 영양분을 빨아먹으며 몸을 활처럼 뒤틀어 짝짓기를 허락했다. 베짱이와 귀뚜라미는 두툼한 날갯살을 암컷이 뜯어먹게 하고 사마귀는 머리를 통째로 선물한다.

▶사마귀나 거미 수컷이 교미할 때 잡아먹히는 것은 건강한 자손을 얻기 위한 '살신공양'이라는 실험결과가 그제 나왔다. 함부르크대 연구진은 짝을 잡아먹은 긴호랑거미 암컷과 못 잡아먹은 암컷의 새끼들을 다양한 경우로 비교했다. 그랬더니 어떤 경우든 수컷을 잡아먹은 암컷의 새끼가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살고 더 큰 알을 낳았다. 연구진은 "수컷의 희생이 번식 성공률을 높이고 종(種)의 번식에도 유익하다"고 했다.

▶최재천 교수는 "수컷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기 유전자를 남기려고 진화해왔다"고 말한다. "거의 모든 동물에서 수컷이 암컷보다 훨씬 더 치열한 경쟁을 겪으며 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직장에서 잘릴까 눈치 보고 집에선 손님처럼 겉돌고…. 남자들 처지가 갈수록 초라해지면서 '사면처가(四面妻家)'라는 말까지 나오는 시대다. 불쌍하도록 처절한 수컷 동물의 세계가 남 얘기 같지 않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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