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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순국 104주기 기획①]‘한국의 복수, 이토 히로부미 죽였다’ NYT 105년 전 대서특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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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세기의 거사’ 하얼빈 현장서 생생 속보로 전해

일본총영사 ‘이토 환영’ 위해 러軍 경호 완화 요청 비화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기(3월26일)를 앞두고 민영통신사 뉴시스가 뉴욕 타임스 등 미국의 주요 매체들이 105년 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거사 당일의 생생한 현장 보도와 이에 얽힌 비화들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그는 군중 속에서 도전적인 자세로 서 있었다. 손에 권총을 쥐었고 두 명의 동료가 옆에 있었다. 경찰이 이들을 덮쳤을 때 총을 쏜 한 명이 격정적으로 외쳤다. ‘나는 우리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토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하얼빈에 왔다!’”

1909년 10월26일 화요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중국 하얼빈(哈爾濱)에서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은 20세기 초 최대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총리만 4회 역임하는 등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최고 실권자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1909년 봄 가쓰라 다로(桂太郎) 총리와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외상이 한국을 강제 합병하는 결정을 할 때도 그의 승인이 결정적이었다.

아시아·태평양의 운명을 쥐락펴락한 68세의 이토를 한국의 이름모를 청년이 저격한 경천동지할 사태를 미국의 모든 매체들은 엄청난 충격 속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뉴욕 타임스는 하얼빈(哈爾濱) 현장에서 누구보다 생생하게 보도했고 당일 송고한 기사로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상세하게 저격 전후의 장면들을 묘사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전했다.

타임스는 안중근 의사와 함께 거사를 결행한 우덕순 조도선 등 세 사람(기사엔 익명)이 공포와 혼란에 빠진 군중 속에서 충분히 달아날 수 있었지만 그 자리에 의연하게 서 있었다고 전해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결행에 들어갔음을 시사했다.

특히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직후 “나는 우리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토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하얼빈에 왔다!”고 격정적으로 외쳤다는 감동적인 육성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이어 “그들은 조국을 폭압(tyranny)으로 몰고간 이토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모의를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토 처단은 일본이 한국에 가한 나쁜 행위에 대한 애국적 동기의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덧붙였다.

특기할 만한 것은 안중근 의사 등이 하얼빈 역에 무사히 잠입할 수 있었던 최대 공신(?)이 일본의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총영사였다는 사실이다. 뉴욕 타임스는 “당초 러시아 당국은 이토 일행의 안전을 위해 현장을 엄격히 통제할 예정이었지만 일본 총영사가 ‘많은 일본인들이 역 앞에서 이토 일행을 환영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고 요청해 경호를 강화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타임스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시간은 당초 알려진 오전 9시30분이 아니라 9시였다. 그리고 이토의 사망 시간도 오전 11시가 아닌, 9시20분으로 나타났다.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 코콥초프 재무장관을 만나기 위해 열차에서 내렸다가 환영인파 속에 있던 안중근 의사가 발사한 리볼버 권총 6발 중 3발을 맞고 20분 후에 절명했다.

나머지 3발은 이토의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일본 남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가 맞았다.

타임스는 당시 미국이 일본과 밀접한 친선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름모를 한국의 청년들의 거사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다뤘고 저격의 목적을 톱제목으로 올림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위한 의로운 결행임을 미국 독자들에게 알렸다.

재미 언론인 문기성(53)씨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처단을 보도한 뉴욕 타임스의 기사는 놀랍도록 상세하고 공정했으며 약소국의 처지에 대한 연민의 시선마저 느껴진다. 불편부당한 뉴욕 타임스의 명성이 100여년 전에도 변함이 없었음을 말해준다”고 평가했다.

이토 저격을 제목만 4단으로 9개로 나눠 쓸만큼 쇼킹하게 받아들였다. 톱 제목은 ‘이토 죽였다, 한국 점령을, 복수하기 위해(Slew Ito to Avenge, Conquest of Korea)였고 두 번째 제목은 ‘다른 한국인들 동행, 하얼빈 저격, 모의 시인(Assaissination at Harbin, Accompaniesd by Other Koreans and They, Admit a Conspiracy)’이라고 달았다.

이어 고딕체로 ‘백작 세 발 맞았다(PRINCE`SHOT THREE TIMES)’는 세 번째 제목과 ‘러시아 재무장관 만나는 순간, 저격자 앞으로 달려가, 다른 3명의 일본인도 피격(Was About to Meet Russian Minister, When Murder Rushed Forward, Three Other Japanese Shot)’의 네 번째 제목이 이어졌다.

또한 본문은 3개의 단락으로 나눠 ‘6발 군중 속에서 발포(Six Shots Fired into Throng)’와 ‘한국인들 공모 시인(Koreans Confess a Plot)’이라는 소제목으로 나눠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다음은 뉴욕 타임스 기사 전문 번역본.

▲ 한국 점령을 복수하기 위해 ‘이토’ 죽였다(Slew Ito to Avenge Conquest of Korea)

만주의 미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오는 러시아의 코콥초프 재무장관을 만나기로 한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 백작이 26일 아침 9시 한 한국인 저격자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 3발의 총을 맞은 그는 20분 후 사망했다.

또다른 3발은 이토의 수행비서와 하얼빈주재 가와카미 일본 총영사, 남만주철도의 다나카 국장이 맞았으나 목숨을 건졌다. 이번 범행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가져온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복수를 위한 것이었다.

암살의 기회가 주어진 것은 가와카미 총영사의 요청 때문이었다. 당초 러시아 당국은 이토 대표단의 안전을 위해 충분한 경찰 병력을 배치하려 했으나 가와카미 총영사의 요청으로 하지 않았다. 가와카미 총영사는 모든 일본인들이 이토 일행을 환영할 수 있게 역 앞에 들어오도록 협조를 원했다. 많은 일본인들이 역 앞에 모였고 그 가운데 암살을 위해 나타난 한국인 저격자들 3인이 있었다.

▲ 6발 군중 속에서 발사(Six Shots Fired into Throng)

이토 총리는 기차에서 내리면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미소를 띈 채 환영의 인사에 답하며 그는 미리 와 있던 코콥초프 장관을 향해 앞으로 걸어갔다. 코콥초프는 역 플랫폼 쪽에 조금 떨어져 있었다.

돌연, 6발의 리볼버 권총 소리가 들렸다. 연이은 총소리에 이토 근처에서 비명의 소리가 들렸다. 이토가 비틀대며 쓰러졌다. 그는 세 발을 맞았고 그중 두 발은 복부에 맞은 것으로 확인됐다.

저격은 군중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토 외에 누가 다쳤고 누가 달아났는지 파악하는 것은 시간이 걸렸다. 이토가 혼수 상태에 빠지고 나서 세 사람이 총을 맞고 부상당했지만 죽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격렬한 분노에 찬 가해자(perpetrator)는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군중 속에서 도전적인 자세로(defiantly) 서 있었다. 손에 권총을 쥐고 있었고 두 명의 동료가 옆에 있었다. 경찰이 이들 3명을 덮쳤을 때 총을 쏜 한 명은 격정적으로 외쳤다.

“나는 우리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토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하얼빈에 왔다.”(“I came to Harbin for the sole purpose of assassinating Prince Ito to avenge my country.)”

▲ 한국인들 공모 시인(Koreans Confess a Plot)

한국인 3명은 누구도 달아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의연하게 이토를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짰다고 밝혔다. 그들의 조국을 폭압(tyranny)으로 몰고 간 이토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모의를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토 처단은 일본이 한국에 가한 나쁜 행위에 대한 애국적 동기에 따른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사에 따르면 그는 이토에 의해 동료들이 처형된 개인적 원한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한국인 저격자들이 많은 일본인 환영 인파 속에 있었기 때문에 구별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사망 직후 이토의 시신은 일본으로 운구하기 위한 준비로 안치됐다. 그의 관은 꽃으로 장식되고 그의 공적인 삶에 대한 슬픔이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됐다.

이토 총리와 러시아 장관의 회담은 이토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회담 주제에 관한 것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만주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등 미묘한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당초 코콥초프는 일본에 와 달라는 초청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해 하얼빈에서 회담이 열리게 됐다. 러시아 장관은 초청을 수락하면서 정치적 문제들은 배제되야 한다고 조건을 달았다. 만주철도에 관련된 금융과 기술적인 문제들을 논의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양자 회담은 사전에 발표됐지만 대표단이 하얼빈에 도착하고 나서야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1909년 10월26일 송고, 10월27일 발행 뉴욕 타임스>

robi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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