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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화가 길진섭·한상익을 아시나요"

매일경제 김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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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열 씨가 21일부터 경북 안동 문화예술의 전당에 전시될 월북 항일 화가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이충우 기자>

정형열 씨가 21일부터 경북 안동 문화예술의 전당에 전시될 월북 항일 화가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이충우 기자>

"저는 그냥 기러기 아빠예요. 외롭던 저에게 월북 화가의 그림들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죠."

정형열 씨는 40대 중반의 대학 교직원이다.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반기는 것은 아내와 아이들이 아닌 액자들이다.

광복을 전후해 분단에 이르기까지 남북한 1세대 화가들이 그린 작품들이 하나씩 말을 걸기 시작한다. 작가의 속마음과 일제 시대의 우울도 배어나온다.

사회적 통제와 시대의 장벽이 진솔한 표현을 가로막아도 작가는 그 장애물을 비켜가며 고도의 상징과 은유를 동원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저항 문인, 저항 시인은 알려져 있어도 저항 화가는 모르는 것이 정씨는 안타까웠다. 철학을 전공한 그는 주말에 혼자 화랑과 전시회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보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미술을 전공한 동생의 도움으로 하나둘 그림을 모으기 시작할 때 주변 사람들은 '혼자 살더니 미쳤다'고 했다.

북한 미술에 대해선 제대로 된 감정조차 해주지 않는 현실을 모르고 '투기 목적으로 그림을 산다'거나 '미술시장의 숨은 큰손'이라고 수군대기도 했다.


하지만 감상문까지 써가며 정씨가 그림을 모은 이유는 숨겨진 미술사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리쾌대ㆍ한상익의 작품을 비롯해 길진섭의 '추수' 같은 그림이 월북 작가의 것이란 이유로 우리 근대 명화 100선에조차 꼽히지 않아요. 유럽에선 나치 치하에서 저항 운동을 하던 예술가들이 전후 화단을 주도했는데 한국에선 아예 잊힌 존재가 됐죠."

정씨는 사람들이 박수근과 이중섭은 알아도 저항 화가 길진섭은 모른다는 것이 속상하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의식을 가지고 공산주의에서 원하는 선동적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거부했던 월북 화가 한상익, 길진섭 같은 분들은 '회색분자'로 몰렸거든요. 남북한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중국에선 작품 가치를 인정받지만 한국에선 버려졌죠."

원로작가 김흥수 화백의 도쿄미술학교 선배인 한상익은 학창시절 교관이 머리가 길다며 조회시간에 모욕을 준 것에 반항하다 일본을 빠져 나왔다. 분단 즈음 남한으로 가자던 김 화백에게 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두고 갈 수 없다며 북한에 남았던 그는 '유화를 수채화 그리듯 경쾌하게 그려 주체사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북한 화단에서 공격을 받고 숙청당하는 등 산전수전 끝에 생을 마감했다.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길선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길진섭은 그림 그리기를 반대하는 아버지 몰래 '목일회' 같은 동인회를 주도해 항일 그림을 그렸다.


집을 이사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얼마 없는 돈까지 털어 월북 작가들의 그림을 모은 정씨는 경북 안동 문화예술의 전당에서 21일부터 다음달 27일까지 '북한미술특별전' 무료 전시회를 연다.

남한 1세대 작가인 나혜석, 김두환, 이충근 등과 월북 작가인 정온녀, 정종여, 리쾌대, 한상익, 길진섭 등의 그림에 더해 최동일의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고구려 벽화 모사본 13점을 포함한 100여 점을 선보인다.

통일부와 문화부 등에 전시회를 열자고 해도 번번이 거절당했지만 그는 앞으로도 이곳저곳 문을 두드릴 생각이다.

"대통령도 '통일은 대박'이라고 하죠. 저는 정치가ㆍ관료들이 이끄는 '위로부터의 통일'보다는 일상생활과 문화 교류ㆍ이해가 앞서는 '아래로부터의 통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반쪽짜리 역사만 아는 국민들이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매번 핵 같은 군사문제, 개성공단 폐쇄 같은 경제문제만 해결한다고 남북관계가 달라지진 않으니까요."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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