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상하이 사변 (출처: Unknown author, 1932,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32년 1월 28일 자정, 동양의 파리라 불리던 국제도시 상하이는 거대한 포성과 함께 전쟁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 내륙으로의 침략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기획한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철저히 계산된 도발이었다. 앞선 1월 18일, 일본군 간첩에 의해 매수된 중국인들이 일본인 승려들을 습격한 이른바 '일본인 승려 습격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상하이 시민들의 반일 운동을 탄압하고 중국 정부에 터무니없는 요구를 강요했다. 중국 측이 평화를 위해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일본 해군 육전대는 28일 밤 기습적으로 상하이 자베이(閘北) 지구를 공격했다.
일본은 압도적인 화력과 항공기를 동원해 쉽게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차이팅카이(蔡廷鍇)가 이끄는 중국 제19로군의 저항은 완강했다. 상하이 시민들은 일치단결하여 군대를 지원했고, 좁은 골목마다 처절한 시가전이 전개됐다.
일본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대규모 증원군을 파견하고 민간인 거주 구역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상하이의 번화가는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으며,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됐다.
이 사변은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었다. 만주국 수립을 앞두고 전 세계의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일본의 기만술이자, 아시아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욕의 노골적인 표출이었다. 상하이의 참상은 국제 연맹의 조사단 파견을 불렀으나, 일본은 이를 비웃듯 침략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이날 상하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는 장차 아시아 전체를 덮을 거대한 전쟁의 전조였다. 제국주의의 폭주 앞에서 애써 세운 국제질서는 무력해졌다. 상하이 시민들의 피맺힌 절규만이 정의가 사라진 동북아시아의 현실을 웅변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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