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맑음 / -3.9 °
연합뉴스 언론사 이미지

[K-VIBE] 신종근의 'K-리큐르' 이야기…말 위에서 비운 잔, 마상배

연합뉴스 이세영
원문보기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주간으로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마상배를 마시는 장군 [AI 제작 이미지]

마상배를 마시는 장군
[AI 제작 이미지]



우리나라의 술 문화는 흔히 조용히 시와 음악을 곁들이는 풍류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지만, 그 바탕에는 말 위에서 피와 땀을 섞으며 잔을 비우던 역동적인 기마 문화의 기억이 함께 흐르고 있다. 특히 2026년 병오년(丙午年), 말의 해를 맞이한 지금, 말 위에서 마시는 술잔인 '마상배'(馬上杯)는 우리 술 문화 속에 남아 있는 가장 뜨겁고 전투적인 상징으로 다시 조명받을 만하다.

◇ 뿔잔에서 마상배로, 유라시아를 관통한 기마 술문화

마상배의 원천적인 뿌리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기마 유목 민족들이 사용하던 '뿔잔'(각배, 角盃)에서 찾을 수 있다. 말과 가축이 삶의 중심이었던 이들 유목 사회에서 소·양·영양 등의 뿔을 그대로 잘라 만든 잔은 밑이 뾰족해 바닥에 세울 수 없었고, 자연히 말 위나 마차 위에서 한 번에 비우는 용도로 발달했다.

잔을 내려놓을 수 없었기에, 숨 돌릴 틈 없이 단숨에 마시고 다시 고삐를 잡아야 했던 그 형식 자체가 기마 전사 삶의 리듬을 닮아 있었다.

청자상감 국화문 마상배 [동아대 박물관 제공]

청자상감 국화문 마상배
[동아대 박물관 제공]



이러한 뿔잔 문화는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로 확산하며, 사냥과 전쟁, 맹세와 축배를 함께하는 상징적 도구로 자리 잡았다. 뿔잔은 식기의 범주를 넘어 '멈출 수 없는 결의'와 '전사 공동체의 연대'를 드러내는 표식이었다는 점에서, 이후 한반도에서 발전한 마상배의 정신적 기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마상배의 뿌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백제·신라의 고분 유적에서는 짐승의 뿔을 형상화한 각배가 종종 출토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밑이 뾰족하거나 높은 굽을 지닌 형태로, 단지 바닥에 두고 천천히 음미하기보다는 움직임 속에서 재빨리 마시는 데 적합한 구조를 띠고 있다.

특히 가야와 신라 지역의 고분에서는 말 탄 무사 모양의 토기와 함께 뾰족한 뿔잔이 세트로 발견되기도 한다. 말과 무사, 그리고 뿔잔이 한 장면 안에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은 한반도가 유라시아 기마 유목 문화권과 긴밀히 교류했을 뿐 아니라, 말 위에서 술을 마시는 용맹한 기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술은 기호품이 아니라,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고 집단의 결속을 다지는 상징적인 매개였다.

◇ 고려 청자와 몽골 기마 문화, 마상배의 격을 높이다


고려 시대로 접어들면서 마상배는 실용적인 전장 도구를 넘어 예술성과 격조를 갖춘 기물로 성장한다. 세계사를 뒤흔든 몽골 제국과 원(元)의 기마 문화가 고려에 강하게 유입되면서, 말과 전마(戰馬)는 군사력의 핵심이자 통치 질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고려의 뛰어난 청자 기술은 이러한 기마 문화와 결합해, 비색 청자로 된 정교한 마상배를 탄생시켰다.

당대 귀족과 장수들은 비췻빛 청자 마상배에 소주와 약주를 따라 마시며, 전장의 긴장과 궁정의 풍류를 동시에 맛보았다. 이때부터 마상배는 단지 말 위에서 흔들리지 않게 잡고 마시기 위한 도구를 넘어, 전사 귀족 계층의 지위와 명예를 상징하는 '휴대 가능한 의례용 술잔'의 성격을 갖게 된다. 귀와 굽, 문양과 비색이 어우러진 청자 마상배는 말 그대로 '움직이는 예술품'이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마상배는 군사적 의례의 핵심 도구로 정착한다. 전쟁터로 떠나는 장수에게 임금이 내려주던 하사주는 대개 마상배에 담겨 전해졌고, 변방을 지키는 무인들은 혹한의 산성과 요새에서 말 위에 올라 마상배로 술을 돌리며 두려움과 피로를 떨쳐냈다.


특히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 마상배는 투박하지만 힘 있는 철화 문양과 거친 흙살 그대로의 질감으로, 무인의 호방한 기개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넝쿨무늬나 초화문이 휘갈겨진 분청 마상배는 단정하고 공들인 궁중 자기와는 다른 결을 지니며, 언제든 말을 타고 달려 나갈 준비가 돼 있는 '실전형 술잔'으로서의 분위기를 풍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분청 철화 넝쿨무늬 마상배는 이러한 시대적 공기를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다.

분청사기 철화 넝쿨무늬 마상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분청사기 철화 넝쿨무늬 마상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마상배가 일반적인 술잔과 뚜렷이 다른 점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잔의 몸통보다 훨씬 길고 높은 굽이다. 이 높은 굽은 장식만이 아니라, 흔들리는 말 위에서 손가락을 깊게 끼워 쥐기 위한 손잡이 역할을 한다. 말의 상하 진동과 좌우 흔들림 속에서도 잔을 놓치지 않도록 고안된 구조인 셈이다. 따라서 굽을 움켜쥔다는 행위는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한 번 맺은 결심과 인연을 놓치지 않겠다는 무인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다음에 마상배는 바닥이 뾰족하거나 좁아 평지에 안정적으로 세울 수 없는 잔이다. 이런 형태 때문에 '기전'(騎盞), 즉 말 탄 자의 잔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다. 내려놓을 수 없는 잔이라는 특성은 '잔을 들었으면 남김없이 비워야 한다'는 결연한 음주 예법으로 해석됐다.

승전하거나 임무를 완수해 말에서 내려오기 전까지 잔을 놓지 않겠다는 약속, 도중하차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마음가짐이 바로 마상배에 담긴 정신이다.

◇ 술의 선택에 담긴 실용성과 상징성

오늘날 한국 술이라 하면 막걸리를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마상배에 담겼던 술은 철저히 소주와 약주 위주였다. 여기에는 기마 전투와 이동이라는 전장에서의 실용성, 그리고 군신 관계를 상징하는 상징성이 동시에 반영돼 있다.

증류주인 소주는 도수가 높아 적은 양으로도 빠르게 체온과 기운을 끌어올릴 수 있었고, 혹한의 새벽이나 장거리 행군 중에 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휴대용 열원' 역할을 겸했다. 마상배의 작은 용량은 이런 독주를 한 번에 털어 넣기에 적합했으며, 상대적으로 변질이 덜해 안장에 매달고 다니기에도 용이했다.

한편, 쌀이나 곡물을 맑게 걸러낸 약주는 임금의 하사주나 중요한 의례에 사용됐다. 투명한 술잔 속에 비치는 맑은 술은 군신 간의 도리, 변치 않는 충성과 신의를 상징했다. '흐림'보다 '맑음'을 중시한 당시 무인들의 정신세계에서, 찌꺼기 없는 투명한 술은 곧 잡념 없는 결의와도 같은 이미지였다.

반대로 막걸리가 마상배에서 배제된 이유는 실용적 한계가 분명했다. 막걸리는 발효 후 미세한 쌀겨와 효모가 남는, 이른바 '찌꺼기 있는 술'이다. 굽이 깊고 안이 좁은 마상배에 막걸리를 따르면 바닥에 침전물이 고여 세척이 어렵고, 말 위에서 재사용하기에 위생과 관리 측면에서 불리하다. 또한 탄산이 남아 있고 부피도 큰 막걸리는 들고 흔들리는 환경에서 마시기에 부적절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기동성과 상징성을 모두 필요로 했던 마상배에는 자연스럽게 소주와 약주가 선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실제로 말을 타고 마상배를 사용하는 장면은 거의 볼 수 없지만, 그 형식과 정신은 여전히 우리 술 문화 속에 잔향처럼 남아 있다. 잔을 내려놓지 않고 끝까지 비워내는 결단력,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짧은 한 모금의 술로 서로의 용기를 확인하던 전사들의 풍류는, 경쟁과 불확실성이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삶의 태도다.

2026년 병오년, 말의 해를 맞아 마상배에 담겼던 그 뜨겁고 투명한 소주 한 잔을 떠올려 보자. 비록 말 위가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잔을 들더라도, 한 번 든 마음을 쉽게 내려놓지 않는 끈기, 험한 길에서도 서로에게 잔을 건네며 버티던 연대의 기억을 함께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광야를 달려 나가는 우리의 한 해가, 그 옛 전장의 기상만큼이나 뜨겁고 또렷하기를 기원해 본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연합뉴스 앱 지금 바로 다운받기~
▶네이버 연합뉴스 채널 구독하기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정철원 양육권
    정철원 양육권
  2. 2이해찬 시민분향소
    이해찬 시민분향소
  3. 3대미투자 특별법
    대미투자 특별법
  4. 4아시아 베스트11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
    아시아 베스트11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
  5. 5국회 입법 속도
    국회 입법 속도

연합뉴스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당신만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