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규백 국방부 장관이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엘브리지 콜비 미국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과 접견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 |
2023년 5월 17일, 헨리 키신저 박사는 100회 생일을 기념해 이코노미스트지(誌)와 인터뷰하며 “5년 내에 일본이 핵무장을 하게 될 것”이라는 충격적 발언을 했다. 곧이어 5월 26일 그는 WSJ과의 인터뷰에서도 “중국의 세력 팽창에 대응해 일본이 대량살상 무기를 자체 개발할 것이라고 관측하면서 핵무장까지 짧게는 3년, 길게는 7년이 걸릴 것”이라며 소신을 재확인했다.
당시 국제사회는 현실성 없는 예언으로 치부했고, 일본의 평화 헌법주의자들도 일본 국민 정서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일축했다. 이 발언을 두고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와 전직 고위 관료는 필자에게 “키신저가 중국 문제에는 정통하지만 일본에는 문외한”이라며 일본 국민의 핵무장 지지율이 10% 미만이라고 했다. 6개월 뒤 키신저 박사의 타계로 이 폭탄선언의 배경은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 2기 시대의 동북아 난기류와 최근 다카이치 신임 일본 총리의 거침없는 행보가 키신저의 예언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위기감은 미국 정계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스티븐 비건 전 국무부 부장관은 북한의 핵 위협에 대응해 일본이 자체 핵 개발에 나설 수 있다고 이미 경고했다. ‘아시아 황제’로 불리는 커트 캠벨 전 국무부 부장관도 중국의 막대한 군사력 확장으로 더 이상 미국이 홀로 맞설 수 없음을 역설했다. 트럼프의 핵심 안보 책사인 엘브리지 콜비 국방차관이 주장하는 ‘거부에 의한 억제(deterrence by denial)’ 전략은 적의 공격 의지와 능력을 사전에 봉쇄하는 데 중점을 둔다. 단순한 보복을 넘어선 정밀 타격 능력과 밀도 높은 전력배치를 의미하며, 동맹의 긴밀한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일본의 역할론과 맥락을 같이한다.
일본 내부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오랜 기간 핵무기 제조·보유·반입 금지의 3불(不) 정책이 압도적 주류였던 나라에서, 지난 12월 18일 다카이치 총리실 고위 간부가 핵무장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중국은 전범국인 일본의 핵무장을 ‘아시아의 재앙’으로 규정하며 강력히 반발했다. 하지만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은 이 발언을 “정부 공식 입장이 아니라 비보도를 전제로 한 사견”으로 두둔하며 인사 조치조차 하지 않았다. 다카이치 정권 출범 후 일본 안보 정책의 변화된 기류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23일 일본 도쿄 중의원 해산을 앞두고 일본 총리 겸 집권 자민당 다카이치 사나에 대표가 국회의사당에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
세계에서 손꼽히는 학술지와 일본 언론에서도 일본의 핵무장에 대한 심도 있는 주장과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필립 고든 전 유럽 담당 국무부 차관보와 마라 칼린 국방부 차관보는 이달 ‘포린 어페어스’에 미국의 핵우산(확장 억제) 제공에 대한 우방국들의 신뢰 하락이 새로운 국제사회의 특징이 됐다고 지적했다. 더 나아가, 이 불신에 대한 마땅한 대안(플랜B)이 없다는 점을 새로운 위기로 규정했다. 2024년 한국갤럽과 최종현학술원이 공동 조사한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 지지율이 70%를 상회했다는 사실도 비중 있게 다루면서, 이런 높은 핵무장 지지율은 북핵 위협의 고도화 못지않게 미국의 핵우산 제공 가능성에 대한 불신을 보다 근본적인 원인으로 분석했다.
일본 ‘문예춘추’ 1월호 역시 중국의 급속한 핵 전력 증강과 북한 핵의 고도화로 동아시아 안보 환경이 유럽보다 훨씬 불안정하다는 점에 전문가들이 공감하며, 일본 안보 전략의 근본적 재검토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최근 그린란드 사태 이후 유럽 주둔 미군의 철수, 심지어 미국의 NATO 탈퇴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동맹국들은 플랜B 모색에 더 절박해지고 있다. 지난주 워싱턴포스트 사설은 트럼프가 북한핵을 인정하고 핵군축 협상으로 진입할 경우 한·일의 선택지는 핵무장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우려했다.
일본은 비핵 3원칙 등 기존 안보 전략의 재검토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한국도 플랜B 마련에 집중해야 한다. 이는 한미 동맹에 기반한 플랜A와 병행해 한·일간 북핵전략, 인도태평양전략, 대중국전략, AI의 군사적 이용, 우주 협력 등 첨단 분야에서 심도 있는 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것을 포함한다. 총괄 채널로서 한일 외교·국방 장관 2+2 회의 신설도 적극 고려해볼 만하다.
한국 사회는 한일 안보 협력 강화를 논할 때 일본 자위대의 우리 영토 진입을 연상해 부정적 반응을 보여왔다. 하지만 이제 시각을 넓혀야 한다. 북한 잠수함 견제와 북핵 시설에 대한 실시간 추적을 위한 우주항공 분야 협력처럼, 재래식 육상 전투 협력이 아닌 첨단 과학·기술 영역에서 새로운 파트너십 확장이 필요하다. 주요 안보 정책에서 한·일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어 2026 미국방전략(NDS) 채택 이후 미국에 대한 공동 교섭을 해나가는 새로운 안보 패턴의 창출을 기대한다.
중국이 일본의 핵무장을 원하지 않는다면, 중국 자신의 핵무장 확대를 자제하고 북한이 불가역적인 비핵화 조치를 취하도록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미 외교가의 강경론자 존 볼턴이 2013년 “중국이 북한 핵 개발의 야욕을 꺾지 못하면 일본의 핵무장이 더 설득력을 얻을 것”이라고 한 경고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을 받고 있다. 중국은 한국에 일방적인 인내만 강요해선 안 된다. 북핵 문제에 책임 있는 행동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동아시아가 키신저의 암울한 예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박인국 前 주유엔대사, 최종현학술원 초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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