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직물 공장 원풍모방의 여성 조합원들이 1982년 9월27일부터 10월1일까지 진행된 공권력의 노조 파괴에 맞서 작업장 기계들 사이에서 새우잠을 자며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필자 제공 |
“우리 조합원들이 폭행을 당하고 있어요.”
“네 뭐라고요?”
“남자들에게 폭행을….”
전화는 뚝 끊어져 버렸다. 미친 듯이 버튼을 눌렀지만, 소용없었다. 1982년 9월27일 오후 1시께, 여성 조합장의 외마디가 원풍모방 노조와의 마지막 통화가 되었다.
강제사직으로 원풍모방 공장을 떠난 뒤 풀무원 두부 배달원으로 일하던 내가 전화를 한 건, 며칠 전부터 남자 직원들이 정보과 형사들과 술집으로 몰려다니는 등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소식을 들은 때문이었다. 1980년에 노조 간부들이 대거 계엄사령부에 연행되어 일부는 삼청교육대에 보내졌고 16명이 해고되었다. 나도 그중 한명이었다. 그 후 원풍모방 노조는 새 집행부를 꾸려 빈자리를 채우고 위태한 상황을 수차 넘어왔다. 몇년 사이 1970년대 민주노조가 모두 파괴당해 “민주노조 최후의 보루”라 불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982년 추석을 닷새 앞둔 날, 그 보루를 깨기 위한 전방위 작전이 몰아쳤다.
노조는 부조합장, 총무 등을 ‘사칙 위반’으로 해고한다는 공고가 회사 게시판에 붙은 일로 긴급회의 중이었다. 갑자기 부공장장을 위시하여 낯선 남자들까지 한 무리가 철컥철컥 노조 사무실로 몰려와 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그들은 저항하는 여성 노조 간부들을 끌어내고 조합장을 감금했다.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머리가 찢기고 허리가 부러지거나 유리에 찔려 여러명이 병원으로 실려 갔다. 아수라장이 된 공장 밖에는 어느새 경찰차가 진을 치고 방송국 기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실려 가고 여성 조합장이 남자들에게 감금되었는데 경찰은 바라만 보았고 언론은 이 사건을 “노조의 내부 분열”로 보도했다. 소식을 접한 지학순 주교, 이우정 교수, 이창복 선생 등이 달려와 경비실에서 조합장 면회를 요청했다. 그러나 회사 간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노동부 직원들이 모여 실실 웃으며 “회의 중이라서 불가능하다” 막아섰다. 원풍노조를 깨기 위해 ‘관계기관 대책회의’(검찰, 노동부, 구청, 안기부, 국군보안사령부)가 가동되었다는 건 훗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에서 밝혀졌다.
조합장을 감금한 자들은 “노조 대표 사직하라” “직인과 통장 내놔라” 위협했다. 다행히 그들이 쳐들어오는 순간 직인과 통장은 노조 사무직원 속옷에 담아 피신시킨 뒤였다. 반조직 행위에 가담한 일부를 제외한 600여명의 조합원이 작업장에 집결해 항의 투쟁을 시작했다. 대부분이 여성들이었지만 소수의 남자 조합원이 합류해 농성장 주변을 주시했다.
조합장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밤은 깊어 가고 세상은 모르는 채 잠든 새벽, 노조 사무실을 살피던 남자 조합원 눈이 화들짝 커졌다. 문이 열리며 불빛 사이로 자루를 둘러멘 남자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조합장이 죽은 걸까? 정신없이 달려갔으나 공장 밖으로 내빼버린 차를 잡을 수 없었고 그는 다시 공장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조합장은 실신한 채 서울 화곡동의 쓰레기매립장에 내던져졌다가 정신을 차려 공장으로 왔으나 출입을 차단당했다.
섬유·직물 공장 원풍모방의 여성 조합원들이 1982년 9월27일부터 10월1일까지 진행된 공권력의 민주노조 파괴에 맞서 작업장 기계들 사이 찬 바닥에서 잠을 자며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대부분 10~20대 여성이었던 이들은 공권력의 물리적 강압과 회유로 수백여명의 농성자가 40여명으로 줄어들 때까지 닷새간 버티고 또 버텼다. 필자 제공 |
상근 노조 간부들이 밖으로 내몰리고 노조 사무실도 빼앗긴 채 콩나물시루처럼 기계 사이에 자리 잡은 조합원들은 부조합장의 지휘하에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제목은 ‘마지막 십자가’였다.
“단결 없이는 승리 못 하네
원풍모방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단결해야지 그 누가 해결하나요
돈과 권력 야합하여 탄압하는데
우리 모두 힘을 모아 투쟁해야지
마지막 십자가 내가 져야지
정상 가동을 속히 하여라
단체협약 준수하여라”
농성장 밖에만 나가면 폭력배들이 끌어내니 이래저래 단식농성이 되었다. 화장실은 막히고 생리는 터지고 머리는 엉키고 배는 등가죽에 붙어갔다. 배변은 드럼통에, 생리대는 현장의 솜뭉치를 사용했다. 이틀 사흘 픽픽 쓰러지는 숫자가 늘며 병원에 업혀 간 사람도, 업고 간 사람도 다시 들어오지 못했다. 부조합장은 무전기와 생리대가 필요하다는 쪽지를 내보냈고 한밤중에 공장 개구멍으로 비상용품을 소지한 노조 간부가 진입했다. 회사는 보리차를 조달해 오던 식당을 폐쇄하고 현장 안의 수도를 끊었다.
사흘째는 갑자기 온 공장 안에 음악이 울려 퍼졌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노래를 틀더니, “운동장에는 코스모스가 하늘거립니다. 내일모레가 추석인데 선물을 사 들고 귀향하여 부모님을 뵙지 않으시렵니까?” 방송이 반복되었다. 회사는 심지어 고향 부모에게 전보를 쳤다. “당신 딸이 불순분자들의 꾐에 빠져 불법 행동을 하고 있다.” “남자들과 혼숙하고 있으니 임신할 우려가 있다.” “어서 데려가지 않으면 큰일 난다.” 송편을 빚다 느닷없는 전보에 혼비백산해 올라온 부모를 그들은 농성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영자야” “숙자야” “처제” “누나” 불러대며 데리고 나가려는 부모와, 절대 안 간다며 농성대열 가운데로 숨는 딸이 난리가 아니었다. 오빠가 오고 애인이 오고 심지어 고향 면장이 아버지를 앞세워 달려왔다. 며칠째 굶으며 공장 기계 사이 맨바닥에 자루를 깔고 농성하는 딸을 본 부모는 가슴을 쳤다. 일부는 방심해 가족을 만났다가 끌려가고 어떤 부모는 딸과 동료들의 조곤조곤한 설명을 들은 후 회사를 욕하며 어깨 한번 안아주고 돌아갔다. 그러자 회사는 가족에게 술을 먹여 다시 들여보내거나 실패하면 경비실에 맡기고 들어간 신분증을 돌려주지 않으며 갖은 횡포를 부렸다.
나흘째 되던 날, 회사는 더 잔인한 방법을 썼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지쳐 있는 농성장에 갑자기 뜨거운 스팀이 뿜어져 나왔다. 열기에 질식한 조합원들이 픽픽 쓰러지거나 비실비실 문 앞으로 기어 나오면 솔개가 병아리 채가듯 낚아채 갔다.
대표적 민주노조였던 원풍모방 노조는 1982년 10월1일 공권력에 의해 파괴당했다. 추석날이던 그날 새벽, 경찰이 들이닥쳐 사내 농성 중인 원풍모방 조합원들을 연행하고 있다. 필자 제공 |
닷새째, 끌려나가고 뜯어져 나가고 질식해 업혀 가고 난 최종 40여명이 작업장을 나와 운동장 맨바닥에서 부둥켜안은 채 버티기 시작했다. 나란히 원풍모방에 입사했던 나의 세자매 중 언니는 퇴직, 나는 해고, 셋째인 동생은 마지막 농성자로 그곳에 있었다. 직장에 사표를 낸 나는 매일 원풍모방 밖에서 공장 안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한가위 전야의 달은 공장의 하늘 위에도 똑같이 환했으나 야속하게 고요했다. 낮에 보이던 민주 인사들은 왜 다 가버렸단 말인가, 정의를 말하던 대학생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거야? 새벽 공기가 스산하고 위태로웠다. 영등포 지역 다른 공장 친구 몇이 보였다. 눈물 나게 반가워 손을 잡은 우리는 길가에 잠시 쭈그리고 앉았다. 그때였다. 비명 같은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모두 다 끌려 나오고 있어, 두들겨 맞고 있어!”
대표적 민주노조였던 원풍모방 노조는 1982년 10월1일 공권력에 의해 파괴당했다. 추석날이던 그날 새벽, 경찰이 들이닥쳐 사내 농성 중인 원풍모방 조합원들을 연행하고 있다. 필자 제공 |
아, 눈에 비친 광경은 늑대에게 쫓기는 양 떼였다.
몽둥이를 든 남자들에게 맞으며 공장문 밖으로 내몰린 조합원들이 차도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었다. 나도 정신없이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람 살려!” “우리 좀 살려주세요!” 휘영청 달빛을 가르며 아스팔트 위를 달렸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노란빛을 발사했다. 그 무엇도 생각나지 않았다. 차라리 차 바퀴에 깔려 죽고 말리라. 순간 코앞에서 차가 급정거했다. 차들이 모두 서고 있었다. 경찰이 그물처럼 조여들기 시작했다. 도로 가운데서 길이 막혔다. “교회로 들어가자!” 누군가 소리쳤고 바로 옆의 양문교회로 뛰어들었다. 새벽예배를 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1970년대 민주노조 최후의 보루를 지키던 ‘마지막 십자가’들이 불빛 안에서 하나, 둘 쓰러졌다. 1982년 10월1일 추석날 새벽이었다.
대표적 민주노조였던 원풍모방 노조는 1982년 10월1일 공권력에 의해 파괴당했다. 추석날이던 그날 새벽, 경찰이 들이닥쳐 사내 농성 중인 원풍모방 조합원들을 강제 연행했다. 한 여성 조합원이 이른바 ‘닭장차’에 갇혀 있다. 필자 제공 |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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