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재 미국 퍼먼대 경영학 교수 |
금과 은은 오랜 기간 본원통화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19세기 후반 금본위제가 대세로 자리잡기 전까지는 금과 은이 동시에 통용됐다. 1840년 아편전쟁 이전에는 중국 등을 중심으로 은이 더 넓게 사용됐다.
은이 금에 패배한 것은 역설적으로 금에 대한 은의 상대적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와 호주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고 골드러시가 일어나자 금 공급이 크게 늘었다. 실물시장에서 저평가된 금은 대규모로 유통됐고 은은 금고로 들어갔다.
고평가된 금(악화)이 저평가된 은(양화)을 밀어내고 본원통화의 왕좌를 차지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이 재연됐다. 금본위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금본위제 아래에서 세계 경제는 안정성장을 구가했다.
금본위제가 제대로 운용되기만 하면 각국의 무역수지는 자동적으로 해소됐다. 국제무역의 지불수단인 금이 무역수지 적자국으로부터 흑자국으로 유출됐다. 무역적자 국가에서 본원통화인 금 보유량이 줄어들자 그에 기반해 발행되는 화폐의 공급도 감소했다.
화폐량 감소는 통화가치를 높여 물가에 하락압박을 가했다. 제품가격 하락은 국제경쟁력 회복으로 이어져 국제수지가 개선됐다. 금본위제의 규칙은 열강이 사생결단으로 맞선 세계대전 앞에서 무력했다. 각국은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금 보유량을 무시하고 화폐를 남발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은 전쟁 배상금을 갚느라 천문학적인 속도로 마르크화를 발행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야 금본위제는 되살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1944년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결정된 수정된 금본위제는 미국만의 것이었다.
미 달러화 가치를 금 1온스당 35달러에 고정하고 다른 나라 환율은 달러화에 페그하는 달러 중심 관리체계였다. 1971년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달러화와 금의 불태환을 선언했다. 미국 스스로 미국만의 금본위제에서 탈피해버렸다.
미국이 금 보유량을 초과하는 달러화를 발행해 유통했기 때문이다. 금본위제가 무력해지자 인플레이션이 찾아왔다. 설상가상 중동전쟁의 발발로 국제정세가 불안정해지고 국제유가가 급등해 경기마저 침체에 빠지자 스태그플레이션이 세계 경제를 나락으로 몰았다.
미국은 안보우산을 제공하는 대가로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지켰지만 달러화 신뢰에 대한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최근 지정학적 위기가 심화하고 미국의 안보우산 약속마저 흔들리자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고 미 국채수요도 약해졌다.
반면 중국을 중심으로 각국 중앙은행은 금 사재기에 나섰다. 그 덕택에 금값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며 온스당 5000달러에 바짝 다가섰다. 산업수요까지 몰린 은값은 처음으로 100달러를 돌파했다.
문제는 매수된 금은 실물이 유통되지 않고 금고로 퇴장한다는 사실이다. 금은이 사상 최고수준으로 양화로서 지위를 회복하고 있다. 금은 가격의 상승랠리가 단지 달러약세 헤지를 넘어 금은 본위제로의 복귀 시도는 아닌지 예의주시해야 한다.
김성재 미국 퍼먼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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