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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중장의 꼭두각시였던 김일성과 박헌영 [호준석의 역사전쟁]

조선일보 호준석 국민의힘 전 대변인, 현 서울 구로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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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좌익의 역사관은 ‘대한민국은 미군정과 친일 세력이 합작한 분단 획책 정권’, ‘북한은 자주적으로 세워진 민족적 정권’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사실이 아닙니다. 분단을 획책한 정권은 김일성 정권입니다. 사실상의 정부인 인민위원회를 먼저 수립하고, 인민군을 먼저 창설하고, 토지 개혁도 독자적으로 단행해 버렸습니다. 친일 정권도 김일성 정권입니다. 거의 전원이 독립운동가였던 이승만 초대 내각과 달리 김일성 초대 내각은 16명이 반민특위 기준 진성 친일파로 구성됐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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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정권은 자주와는 거리가 먼 정권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미국의 적극적 지지를 받지 못했고 정부 수립 때까지도 미국과 긴장 관계가 유지됐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철저하게 소련 스탈린의 꼭두각시였습니다. 그런데도 남한의 좌익 세력은 집요하고 교묘하게 이런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정반대로 선동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결정적으로 뒤집는 사료가 1995년 발굴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티코프 비망록’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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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치비치 스티코프는 1945년 해방 후 사실상의 ‘북한 총통’이었습니다. 1907년생으로 당시 30대에 불과했지만 소련군 연해주군관구의 정치 담당 부사령관(중장)이자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북한군정청 총사령관 역할을 했고, 1948년 김일성 정권 수립 후 1951년까지 초대 소련 대사를 지냈습니다. 그는 김일성 정권의 설계자이자 실행자였습니다. 당시 평양에 상주했던 소련군 실력자 니콜라이 레베데프는 훗날 “스티코프의 참여 없이 북조선에서 이뤄진 조치는 단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상황이 기록된 북한의 1차 역사 자료에 우리는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스티코프 비망록’마저 없었다면 역사의 진실은 영영 땅속에 묻혀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역사의 섭리가 작동한 것일까요. 주도면밀하고 꼼꼼한 성격이었던 스티코프는 매일 일어난 일, 자신의 구상 등을 일기 형식으로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핵심 인물들이 빌미를 잡히지 않으려고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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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사의 섭리가 또 한 번 작동합니다. 1964년 스티코프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50세로 사망한 뒤, 스티코프 비망록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로 어렵게 살아가던 장남 빅토르의 집 차고 구석에 방치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5년 중앙일보 현대사 자료 발굴팀이 7개월의 추적 끝에 비망록의 존재를 확인하고 빅토르를 설득해 마침내 기증받은 것입니다. 당시 빅토르는 이미 60세가 넘은 때였고, 더 늦어졌다면 스티코프 비망록은 영원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폐기돼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스티코프 비망록에는 소련의 낙점을 받은 북로당의 김일성, 그리고 김일성과 경쟁하던 남로당의 박헌영이 얼마나 철저하게 스탈린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사례가 1946년 남한에서 일어난 9월 총파업과 대구 10월 사건입니다.


1946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수배돼 월북한 박헌영은 ‘신전술’, 즉 폭력 투쟁으로 남한 정국을 뒤흔들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처음 실행된 것이 9월 총파업과 대구 10월 사건입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주도한 9월의 전국적 총파업과 폭력 시위로 전국은 마비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대구 10월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대구 10월 사건은 2년 뒤 1948년에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과 매우 비슷한 양상입니다. 여수 14연대 좌익 세력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여수·순천을 점령한 뒤 전남 전 지역으로 진격했던 것처럼, 좌익 세력은 대구에서 경찰관과 우익 인사들을 학살한 뒤 경북 전 지역으로 진격해 내전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대구에서 경찰관 38명, 공무원 163명, 민간인 73명이 사망했고, 경북에서는 경찰관 80명, 공무원과 우익 인사 등 민간인 24명 사망, 행방불명과 납치가 145명이었습니다(이상 미군 G-2 보고서). 사건 진압 후 남로당원 1500여명이 구속됐고 5명이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좌익 세력의 학살극으로 시작됐지만,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과잉진압으로 억울하게 숨진 양민이 많다는 점도 여수순천사건과 비슷한 점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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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좌파는 9월 총파업과 대구10월사건이 식량난 때문에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민중 봉기, 미군정의 실정에 항의하는 민주 투쟁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스티코프 비망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1946년 9월 9일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물어왔다.”

그리고 스티코프는 11일과 16일 이렇게 답합니다. “미군정과 남조선 반동파의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와 항의집회를 개최하라”.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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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이 물은 ‘사회단체’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입니다. 이후 전평은 긴급회의를 소집해 당초 10월로 계획한 총파업을 9월로 앞당깁니다. 9월 23일 부산 철도 노동자 7000여 명을 시작으로 파업이 시작되고, 24일 서울 등 전국 철도노조원 4만명을 필두로 출판·통신 노동자들까지 가세해 전국의 교통·통신·언론이 마비됩니다.

9월 26일 스티코프는 이렇게 지시합니다. “민주주의민족전선(조선공산당의 외곽 단체)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 명령 취소 및 좌파 석방을 요구하라.” 즉, 처음부터 9월 총파업은 식량난과 고물가에 항의하는 파업이 아닌 정치 파업이었던 것입니다.

이틀 뒤인 9월 28일 스티코프는 로마넨코 부참모장, 서울 주재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인 샵쉰, 여운형, 김일성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임금 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 석방, 좌익 신문 복간, 공산당 지도자 체포령 철회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 투쟁을 계속하라”는 강경한 지시를 거듭 하달합니다. ‘협상을 위해 일부 요구를 철회해도 되느냐’는 문의에 대해 ‘안 된다’는 답변을 내려보낸 것입니다. 같은 날 스티코프는 남조선 파업 투쟁 상황과 여운형과의 회담 내용을 암호 전문으로 스탈린에게 보고합니다. 상명하복의 공산당 규칙이 스탈린 정권과 김일성, 박헌영 사이에 완벽하게 작동되고 있었습니다.


폭력의 원청업체 격인 소련 정권은 하청 대금 지급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9월 28일 북한 주재 소련군 민정부사령관 로마넨코는 “학생들이 합류해 파업 투쟁이 확산되고 있다”며 일본 돈 5백만 엔의 자금 지원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스티코프는 2백만 엔 지급을 지시합니다. 정확한 환산은 어렵지만 현재 가치로 수십억 원대에 이르는 거액입니다. 그런데 이 돈은 모스크바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9월 총파업이 절정이던 9월 27일 김일성의 북로당은 ‘매일 두 시간씩 북한 근로자들의 노동시간을 늘려 그 임금을 남조선 지원 기금으로 사용하자’고 결의합니다. 스티코프는 이 결의 내용에 대해 모스크바의 승인을 얻은 뒤 그대로 집행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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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대구에서 천여 명이 식량 배급을 요구하며 시작된 시위가 확대됩니다. 경찰이 진압을 위해 발포했다가 시위대 1명이 숨지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다음 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무기를 탈취한 뒤 대구와 경북 전역으로 진격합니다. 대구·경북 대부분의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교량과 철도, 우체국이 파괴됐습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끔찍한 방법으로 경찰관, 공무원, 우익 인사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됐습니다. 이것이 대구 10월 사건입니다. 그러자 10월 2일 스티코프는 3백만 엔을 추가로 남한에 내려 보내라고 지시합니다. 거액을 투입해 남한의 비극적 폭력 사태를 조장한 것입니다. 10월 사건이 계속되던 10월 21일 박헌영은 스티코프에게 “파업 투쟁이 폭동으로 성장, 전환됐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빨치산)에게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 향후 투쟁 방침에 대해 교시를 내려달라”고 요청합니다. 같은 날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도 스티코프에게 편지를 보내 “빨치산 투쟁을 본격 개시할지 자제할지 향후 투쟁 방향을 정해 달라”고 문의합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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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과 경찰의 진압으로 수세에 몰린 공산당원들은 북한으로 탈출하거나 태백산, 소백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됐습니다. 박헌영의 문의는 이들의 거취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레닌’이라 불리며 조선 공산주의자 중 최고 거물을 자처하던 박헌영이 초등학생처럼 소련 군정에 일일이 물어보는 장면은 보는 이의 낯을 뜨겁게 할 지경입니다. 나이도 학벌도 투쟁 경력도 김일성보다 훨씬 우위지만 소련의 낙점을 받지 못한 박헌영은 어떻게든 스탈린의 눈에 들어 김일성과의 경쟁에서 전세를 역전시켜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대구 10월 사건이 끝난 뒤인 12월 7일에도 스티코프는 ‘로마넨코의 계좌에 있는 122만 루블을 박헌영에게 전달했다’고 비망록에 썼습니다. 역시 정확한 환산은 어렵지만 최소 수십억 원대 거액입니다. 입만 열면 민족과 자주를 내세우는 한반도의 공산주의자들은 실제로는 명령도, 돈도 소련에서 받는 주구(走狗)들이었습니다. 남로당은 늘 돈이 풍족했고, 반면에 간첩 잡는 경찰 대공 조직은 돈이 없어 쩔쩔맸다는 관련자들의 증언의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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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꼭두각시놀이는 계속됩니다. 1946년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백남운의 신민당, 여운형의 인민당 등 남한의 좌익 3당이 남로당(남조선노동당)으로 합당한 것도 스티코프의 작품이었습니다. 3당 합당 방침을 박헌영에게 통보받은 여운형은 스티코프에게 확인하기 위해 9월 북한까지 찾아갑니다. 정파 간 이해가 엇갈려 합당이 지연되자 소련군정은 합당을 방해하는 백남운과 강진을 북으로 호출해 질책해 가며 박헌영의 손을 들어줍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후 미군정이 추진한 남한의 ‘좌우 합작’을 소련이 방해했다는 사실도 스티코프 비망록으로 공개됐습니다. 미군정은 소련도 호감을 느낄 만한 세력이 남한에서 주도권을 잡으면,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소련과의 협상을 원만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이에 따라 우파의 김규식, 좌파의 여운형 등을 참여시킨 좌우 합작을 추진한 것입니다. 박헌영과 경쟁하던 여운형은 좌파 주도권을 빼앗아 오기 위해 좌우 합작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운형이 1946년 9월 24일 북한을 방문해 이 문제를 문의하자 스티코프는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좌우 합작을 추진하자 말라’고 지시합니다. 결국 좌우 합작은 박헌영의 반대와 좌익의 무리한 요구 등으로 무산됐는데, 그 배후에는 소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미군정은 좌우 합작 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보장하기 위해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 수립까지 추진했습니다. 박헌영은 소련에 ‘만일 의석 50%를 준다면 입법 의원에 들어가도 좋은지’를 문의하기까지 합니다. 자율적인 의사 결정이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력과 미군정은 좌우 합작이라는 중대사를 추진했던 것입니다.

스티코프와 김일성이 사실상의 분단 정권을 먼저 수립한 사실도 비망록에 공개돼 있습니다. 1947년 1월 초 김일성은 연해주의 보로시롭까지 스티코프를 찾아가 치스차코프 대장, 로마넨코 소장과 함께 북한 상황을 논의합니다. 북한은 해방 6개월 뒤인 1946년 2월 이미 사실상의 정부인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법령과 화폐까지 제정했습니다. 그런데 아예 ‘임시’를 떼고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문제를 논의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통일 정부를 내세웠지만, 실제 이들의 일관된 속셈은 공산주의 정권 수립이었습니다. 스티코프와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회 소집과 일정을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다음 달인 2월 17일부터 20일까지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회가 열렸고, 2월 22일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발족합니다. 행정, 입법 조직을 다 갖춘 사실상의 단독정부였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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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코프 비망록의 기록은 1947년 2월에서 끊깁니다. 기록광인 스티코프가 이때까지만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김일성 정권의 산파인 스티코프가 1964년 사망했을 때 김일성은 조전도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망 2년 후인 1966년에는 북한 정권에서 찾아와 스티코프의 부인이 보관 중이던 막대한 분량의 앨범, 문서, 노트, 사진 대부분을 가지고 갔다고 장남 빅토르는 증언했습니다. 1986년 부인이 사망한 뒤 남은 자료는 빅토르가 보관했지만 40번 넘게 이사를 다니는 동안 상당량이 유실돼 버렸다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1947년 2월까지의 비망록이 발굴된 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제주4·3사건, 여수순천사건 등 현대사의 비극이 집중된 1948년, 국회 프락치 사건과 남로당의 궤멸이 있었던 1949년, 6·25남침이 일어난 1950년의 스티코프 비망록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통일 대한민국의 꿈이 이뤄지면 북한 정권이 수거해 간 것으로 보이는 스티코프 비망록의 남은 부분도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고 맙니다.

[호준석 국민의힘 전 대변인, 현 서울 구로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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