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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구독료' 1조5천억, 트럼프의 제국이 열린다 [김경민의 적시타]

파이낸셜뉴스 김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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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달러짜리 '영구 위원' 분담금
UN 밀어내고 '종신의장' 야심, 요직엔 친트럼프 인사들
미국판 나폴레옹 꿈꾸는 트럼프
한국은 사인을 할 것인가


챗GPT 제공

챗GPT 제공


[파이낸셜뉴스] 지난 22일(현지시간) 스위스 다보스포럼 행사장에서는 국제 외교사의 이례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가자지구 재건을 명분으로 내세웠던 '평화위원회(BoP)'의 헌장 초안을 공개하며 본격적인 출범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베일을 벗은 평화위의 실체는 기존의 다자주의 규범과는 궤를 달리한다. 10억달러(약1조5000억원)의 가입비와 의장의 절대적 권한을 명시한 이 기구는 국제 질서를 조약이 아닌 자본과 거래의 영역으로 재편하려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엔(UN)의 무용론을 정면으로 제기하며 등장한 이 '평화 플랫폼'이 세계 정부의 대안이 될지, 아니면 국제 질서의 사유화라는 위험한 실험으로 끝날지 그 내막을 짚어보았다.

평화를 원해요? "입장권은 10억달러"

평화위의 핵심 메커니즘은 단순하고 노골적이다. 헌장(Charter) 초안에 따르면 설립 1년 내 10억달러를 납부한 국가만이 '영구 위원' 자격을 얻는다. 임기 제한은 없다. 반면 자금을 내지 않거나 낼 수 없는 국가는 3년 임기의 단기 위원으로 분류된다. 연임 여부는 전적으로 의장인 트럼프의 판단에 달려 있다. 이는 국제 평화가 조약과 합의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력에 따라 구매 가능한 '프리미엄 상품'으로 전환된 것을 공식화한 것이다.

벌써부터 일각에서는 이러한 구조가 국제 정치의 불평등을 제도적으로 고착화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분쟁의 직접 당사자라 할지라도 경제적 여력이 없는 국가는 의사결정 구조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재정 여력이 있는 부유한 국가들만이 '평화의 주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유엔이 그간 비효율적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보편성과 형식적 평등을 유지해온 이유는, 그 비효율성 자체가 강대국의 독주를 막는 최소한의 안전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위는 '결과 중심의 실용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워 돈이 곧 발언권이 되는 '페이 투 플레이(Pay-to-Play)' 모델을 국제 정치에 이식했다. 평화는 더 이상 인류 보편의 공공재가 아닌 트럼프라는 거대 플랫폼의 유료 서비스가 된 셈이다.

평화위원회 헌장 들고 있는 트럼프. 연합뉴스

평화위원회 헌장 들고 있는 트럼프. 연합뉴스


'종신의장' 트럼프의 제국

평화위가 기존 국제기구와 결정적으로 결을 달리하는 지점은 기형적인 거버넌스(지배) 구조다. 헌장에는 의장이 산하 기구의 설립과 해산, 집행위원의 임명과 해임을 독점한다고 명시돼 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의결 방식이다. 회원국 과반이 찬성하더라도 의장(트럼프)의 최종 승인이 없으면 모든 결정은 무효가 된다. 사실상의 거부권을 넘어선 절대적 재가권이다. 견제 장치나 임기 제한도 없다. 트럼프는 스스로를 기구의 '종신 의장'으로 규정했다는 분석이다.

인적 구성은 이 기구의 사적 성격을 더욱 명확히 한다. 사위 제러드 쿠슈너, 부동산 개발업자 스티브 위트코프, 이라크 전쟁의 오명을 쓴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등 트럼프의 '이너서클'이 핵심 요직을 장악했다. 전문적인 외교관이나 국제법 학자 대신, 의장에 대한 충성도와 개인적 네트워크가 우선되는 이 구조는 국제기구라기보다 '제국의 궁정'에 가깝다는 냉소적인 평가를 낳고 있다. 국제 질서를 보편적 제도가 아닌 한 인물의 정치적 계산과 변덕에 종속시키는 인사는 국제 안보의 가장 큰 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경고가 쏟아진다.


유엔 안보리 회의실. 연합뉴스

유엔 안보리 회의실. 연합뉴스


'가자' 지우고 '세계' 써넣은 야심… UN 대체할 수 있나

당초 평화위는 가자지구의 인도적 재건을 위한 한시적 태스크포스(TF)로 논의됐다. 하지만 다보스에서 공개된 헌장에서는 '가자'라는 단어를 지웠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전 세계 모든 분쟁 지역'이라는 포괄적인 표현이다. 이는 가자가 실험대였을 뿐 실제 목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대체하고 상설 국제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트럼프의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서명식에서 유엔을 "실패한 조직"이라 맹비난하며 평화위가 새로운 세계 정부의 대안임을 숨기지 않았다.

트럼프는 60개국에 가까운 참여를 호언장담했으나 실제 서명대에 오른 국가는 19개국에 그쳤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전통적인 서방 동맹국들은 "국제법 위반이자 주권 침해"라며 불참을 선언했다. 대신 헝가리의 오르반이나 아르헨티나의 밀레이 등 권위주의 지도자들과 트럼프의 환심을 사려는 일부 중동 국가들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이는 '가치 동맹'의 붕괴와 '거래 외교'의 부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9월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안전보장이사회 의장 자격으로 공개 토의를 주재하고 있다. 뉴시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9월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안전보장이사회 의장 자격으로 공개 토의를 주재하고 있다. 뉴시스


'역사는 반복된다' 한국의 선택은

트럼프처럼 '세계의 대통령'이 되려 하거나 상업적·제국적 논리로 국제 질서를 재편하려 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방식은 달랐지만, 제도와 주권 위에 군림하려 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사례들은 반복돼 왔다.


19세기 유럽을 호령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대륙 체계'를 통해 유럽 전역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 했으나 각국의 주권 저항과 경제적 자급자족의 한계에 부딪혀 몰락했다.

또한 상업적 논리로 통치를 수행했던 영국 동인도 회사는 1770년 벵골 대기근 당시에도 수탈 구조를 유지하며 참극을 키웠고, 결국 국가의 공공성을 상실한 기구가 어떤 파국을 맞는지 보여줬다.

20세기 초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국제연맹'을 통해 법치 기반의 세계 정부를 꿈꿨던 것과 달리, 트럼프의 기구는 철저히 거래와 충성에 기반한다. 과연 이 1조5000억원짜리 멤버십은 트럼프의 호언장담대로 세상을 구할 '마스터플랜'이 될 수 있을까. 트럼프의 초대장을 받은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km@fnnews.com 김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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