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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거칠어진 남극의 블리자드

조선일보 김영미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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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 (16)
초속 10m 이상 풍속의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었다. 밤사이 날린 눈이 텐트 주변에 뒤덮여 있었다. 텐트를 접는 동안 바람에 날아갈까 봐 폴대를 빼서 바닥에 주저 앉혔다. /김영미 제공

초속 10m 이상 풍속의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었다. 밤사이 날린 눈이 텐트 주변에 뒤덮여 있었다. 텐트를 접는 동안 바람에 날아갈까 봐 폴대를 빼서 바닥에 주저 앉혔다. /김영미 제공


(2024.11.25. / 운행 18일 차. 위도 82도 50분 / 누적 거리 347.88㎞ / 해발고도 1087m. 0.1초의 단 한 번의 숨고르기도 없이 폭포수 같은 위용을 내뿜는 거친 호흡의 기세가 대단하다. 한 시의 정남쪽 방향에서 나를 정면으로 밀어내는 블리자드!)

바람 소리에 놀라 번쩍 눈이 떠졌다. 눈앞에서 다운패딩이 바람에 멀리 날아가는 모습을 꿈꾸고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거친 바람에 재킷이 풍선처럼 붕 떠버렸는데 재킷을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 딱 한 걸음 앞에서 계속 놓쳐 버렸다. 실제와도 같았던 꿈이 너무 생생하고 사나웠다. 침낭 속에 누워 있는데도 방금 손에서 다운 재킷이 미끄러져 바람에 날아간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렸다.

햇무리가 지나고 약속이나 한 듯 블리자드가 시작되었다. 16일차부터 해발고도 1000m 위로 올라왔다. 바람은 정남쪽 1시 방향에서 계속 나를 밀어내고 있다. 초속 10m 이상의 풍속으로 온종일 한 호흡도 쉬지 않고 기세등등하게 불어댄다. 정말 기운이 세다. 한 방향으로 퍼붓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다. 오른쪽 뺨을 때리는 바람의 감각만으로도 내가 갈 방향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바람의 방향을 읽기 위해 스틱에 묶어 둔 빨간 리본도 바람의 방향을 읽을 수 있는 나침반이 된다.

출발 전 텐트 밖으로 나올 때 말고, 하루 종일 9시간 동안 17㎞를 걷으면서 물을 한 번밖에 마시지 못했다. 물론 간식도 먹지 못했다. 간식을 먹겠다고 서 있는 동안 땀이 식어 몸이 비석처럼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간식 봉지를 열기 위해 장갑이라도 벗으면 금방 동상에 걸려 버릴 것만 같았다. 걸음을 멈추면 추위에 컨디션이 무너질까 봐 겁이 났다.

사실 오늘 같은 날은 쉬었어야 하는 게 맞다. 아침에 버너에 불을 붙이고 텐트 문을 열어 밖을 내다봤을 때 사나운 바람을 보고 ‘쉬어야 하나’라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앞으로 2000m 이상의 고도에서는 기온이 낮아 더 추울 텐데 벌써부터 꺾이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쉬고 싶다는 마음을 눌렀고, 나는 걷는 결정을 강행했다. 바람에 꺾이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와의 내적 갈등에서 져버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걷는 내내 ‘쉬었어야 했어’라는 후회의 마음과 ‘그래도 이왕 텐트를 접고 나왔으니 가는 데까지 가 보자’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왼발의 스키와 오른발의 스키가 번갈아 가며 걷는 것처럼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이런 바람에 내 의지로 나태함을 일깨우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바람이 쉬지 않고 계속 바람의 길을 가는 것처럼, 나도 텐트 밖으로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하루 한 번씩 스키에서 스킨(스키 바닥에 탈부착하는 미끄럼 방지용 테이프)이 떨어지고 있어 나를 불안하게 한다. 오늘 낮에도 스키를 벗고 부츠만으로 이동했다. GPS 시계에 만보계 기능이 있어 걸음 수를 비교했다. 스키를 벗으면 만보당 이동 거리가 7㎞였다. 스키를 신었을 때는 8.5㎞를 걸었으니 하루 2만 보를 걷는다면 약 3㎞의 차이를 보인다. 늘 같은 값의 오차를 보이진 않겠지만 스키를 벗었을 뿐인데 하루 3㎞면 10일을 이동했을 때엔 30㎞의 큰 차이를 가져온다. 스키 없이 걷게 될 경우 발가락 끝이 설사면의 눈을 파내며 걷게 되니 저항이 생겨 다리에 젖산이 더 쌓여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1000m 지대까지만 올라와도 바람이 불면 이렇게 힘든데 2000m에서는 어떻게 견뎌야 할지 겁이 났다.


계속해서 장비 고장이 생겨 불안하다. 이번엔 왼쪽 신발의 지퍼가 고장 났다. 운행 후 텐트를 치고 서둘러 신발을 벗다 보니 신발의 지퍼를 과격하게 다뤘나 보다. 발에서 나온 열기로 3중화인 신발과 신발 사이도 하얀 얼음이 끼어 있는데 얼었던 지퍼가 미처 녹기도 전에 잡아당겨서인지 이가 나가버렸다.

조금도 양보가 없던 바람은 저녁이 되면서부터 숨이 죽었다. 인공호흡기가 떨어져 나간 사망 환자처럼 바람의 호흡이 끊어졌다. 들판을 후다닥거리며 뛰어가는 들짐승 한 마리가 멀리 사라지는 소리처럼 바람 소리가 귓전에서 멀리 달아났다. 놀랍도록 고요한 침묵이 대지 위에 내려앉았다. 얼음덩이 같은 눈을 녹여 찬물을 들이켰다. 종일 애태우던 갈증도 바람 소리처럼 증발되는 기분이다. 남극의 눈을 녹인 깨끗한 물로 끓인 코코아 한 잔에 오장육부까지 노곤해진다. 저녁 운행 후 텐트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은 고된 하루 중 가장 안도하는 순간이다. 남극점까지 중간 지점인 위도 85도의 티엘 코너까지 252㎞가 남았다.

※아시아 최초로 남극 대륙을 단독 횡단한 산악인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을 격주로 연재합니다.

[김영미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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