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임실 덕치면 장암리 진메마을에 사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추운 겨울에도 별일 없이 살고 있다"고 했다. 섬진강 징검다리를 건너다 수달의 배설물을 밟을 뻔 하고, 우연히 날아든 귀한 철새 호사비오리와 눈 마주치며 별일 없이 그렇게.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때로 여행의 이유가 목적지 대신 사람을 향할 때가 있다. 지방 소도시인 전북 임실이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 위기라는 소식에 임실에서 나고 자란,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는 김용택 시인이 떠올랐다. 섬진강변 느티나무 너머 그의 집 겨울 풍경이 궁금해졌고, 시인의 순박한 웃음과 구수한 입담도 생각났다. 인적 드문 한겨울에 시인은 어찌 지내고 있을까. 어린 시절, 겨울방학에 시골집 향하는 마음으로 시인이 사는 덕치면 진메마을을 찾았다. 김용택 시인과 함께한 무해(無害)한 겨울 여행의 기록.
◇글이 모이는 집 ‘회문재’에서
임실군의 인구는 2만5259명(2025년 12월 기준)이다. 덕치면사무소에 따르면, 그중 임실의 남서쪽에 있는 덕치면엔 1100명 정도가 살고, 장암리에는 54명이 산다. 그마저도 거주자로 등록한 주민 수이며 장암리의 실거주자는 20명 남짓인데 그중 한 명이 시인 김용택(79)이고, 또 한 명은 그의 아내이며, 나머지 한 명은 그의 딸이다. 그리고 마을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 그의 친구이거나 친척이거나 그들의 아들이거나 딸이거나, 아무튼 서로 모를 리 없는 ‘김용택 관계자들’이다.
김용택은 전주에서 살았던 10년을 제외하곤 이 집에서 나고 자라 여전히 이 집에서 살고 있다. 전주에 살 당시에도 집필실이 이곳 생가에 있고 모친이 생존해 있어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으니 꼬박 80년 가까이 평생을 이곳, 장암리 진메마을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김용택 시인의 생가이자 집필실인 '회문재'는 '섬진강 문학 기행'의 필수 코스로 꼽힌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날이 따뜻했다면 느티나무 아래 나와 볕을 쬐고 있을 노인들마저 모습을 감춘 좁다란 길, ‘김용택의 작은 학교’란 간판을 따라가니 낡은 한옥 대신 10년 전에 새로 고쳐 지었다는 생가 앞에서 시인이 먼저 나와 팔을 흔들었다. “벽면에 흙이 무너져 내려 한옥 일부를 해체해서 최대한 복원하고, 내부는 현대식으로 단장했어요. 덕분에 날이 좋을 땐 문을 활짝 열어둬요. 그러면 마을 앞 ‘섬진강 자전거 길’을 지나가던 이들이나 여행객들이 잠시 들러 툇마루에 앉아 쉬어가기도 하고, 낮잠을 자고 가기도 합니다.” 상량문 대신 생가 툇마루 한쪽엔 ‘回文齋(회문재)’라 쓴 현판이 ‘대충’ 놓여 있다. ‘글이 모여든다’는 뜻의 이곳 회문재에서 김용택은 섬진강 연작을 쓰며 ‘섬진강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회문재는 마을 인근의 ‘회문산(回文山)’에서 따온 이름이기도 하고, 시인이 다시 고향에 돌아와 글을 쓰는 공간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회문재를 사이에 두고 양쪽엔 단층짜리 자택과 서재 건물이 자리한다. “있는 듯 없는 듯 주변 자연환경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짓기 위해 건축 당시 아내가 고민을 많이 했다”는 건물과 일대를 보고 건축가 유현준도 고개를 끄덕였다고. 현재 생가인 회문재와 서재 건물은 ‘김용택 문학관’ 역할을 하고 있다.
회문재 집필실 너머 돌담길이 그림처럼 걸린다. 시인은 "날씨가 좋을 땐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고 했다. 툇마루에 앉아 누구나 쉬었다 갈 수 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회문재 옆 서재에선 글쓰기 수업이나 강연도 진행한다.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의 사랑방같은 곳이기도 하다. 이 구역에선 8~9년 전 딸이 구조해온 길냥이 '보리'가 마스코트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나지막한 돌담이 두른 ‘섬진강 뷰 맛집’ 회문재는 ‘섬진강 문학 기행’ 일번지이자 임실 여행 코스 중 하나가 된 지 오래다. 이따금 문학관에서 시인은 임실 귀촌인이나 농촌 유학생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과 강연을 진행한다. 학기 중엔 인근에 사는 초등학생들이 들락거리는 사랑방이기도 하다. 방학인 요즘엔 시인의 반려묘 ‘보리’가 집주인인 양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시인이 강연 등 외부 일정으로 출타했을 때를 제외하곤 마을 어딘가에 있기에 탐방 시 운이 좋다면 시인과 조우해 담소를 나눌 수도 있다.
◇“용택이가 여그 있지!”
이름난 시인이라고 해서 이곳에서의 하루가 별다르지 않다. 시인은 “근황을 물을 때마다 ‘그런대로 별일 없이 삽니다’라고 답한다”고 했다. “요즘처럼 다사다난한 세상에 별일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특별해요. 저는 이곳 마을 주민들에게도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마을 주민의 일원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마을 어르신들이 지나가다가 ‘그래, 용택이가 여그(여기) 있지!’라고 느낄 정도로만 살고 있습니다.”
'김용택의 작은 학교'란 간판이 보이면 "김용택이 있는 곳"이다. 보호수인 느티나무 너머 김용택 생가이자 집필실인 '회문재'가 보인다. 오른쪽 단층집은 김용택의 서재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별일 없는 점심엔 생가 옆 마을회관에서 주민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적을 땐 대여섯, 많을 땐 열댓 명이 모이는데, 열 명만 넘어도 시끌벅적하게 느껴진다고. 마을회관에서 밥을 해주는 이도 시인의 제자인데 “음식 솜씨가 아주 좋다”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시인은 인근 덕치초등학교와 마암분교(현 마암초등학교) 등에서 38년간 교직 생활을 하다가 2008년에 은퇴했다. 한곳에서 사니 마을을 떠나지 않은 제자들과의 인연도 일상처럼 이어진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국어책(7차 교과서)에도 실린 글 ‘창우야 다희야, 내일도 학교에 오너라’ 속 제자 ‘창우’ ‘다희’가 그렇다. 2013년도에 펴낸 김용택의 산문집 제목이기도 한 ‘창우야 다희야, 내일도 학교에 오너라’ 속 창우와 다희는 시인이 마암분교 재직 당시 각별히 아꼈던 제자들이다. 시인의 팬들에겐 시인만큼이나 유명한 인물들이다. 한때 창우와 다희의 안부를 묻는 이가 하도 많아서 모 매체에 ‘창우와 다희 근황 인터뷰’까지 했노라고. “이제 서른이 넘은 다희는 덕치면사무소에서 7급 공무원으로 일하고, 창우는 인근 ‘옥정호’에서 매운탕 맛집 ‘상록수’를 운영하고 있어요. 다희는 마을에 전달할 서류 등이 있을 때마다 자주 들러 종알종알 얘기를 나누다 갑니다. 두 녀석 모두 저를 친구처럼 격 없이 대해서 참 좋아요. 말 나온 김에 옥정호로 가볼까요?”
◇섬진강댐에 얽힌 추억 그리고 옥정호
김용택의 작은 학교에서 차로 20~30분 거리 운암면에 있는 옥정호는 손님들이 방문하거나 군의 행사가 있을 때 종종 발걸음한다. 옥정호는 1965년 12월 ‘섬진강 다목적댐’(현 섬진강댐, 이하 섬진강댐) 준공으로 조성된 인공 호수다. 가는 길에 시인은 섬진강댐에 얽힌 추억을 들려줬다. “섬진강댐 준공식 때 박정희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에 마을이 온통 난리가 났어요. 저도 당시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준공식장에 갔는데, 그분도 (키가) 작고, 나도 (키가) 작다 보니 인파에 섞여 서로 얼굴 한번 못 마주쳤죠!(웃음)”
옥정호 '물안개길' 중 '구름바위길' 부근에 있는 정자에선 옥정호와 붕어섬 일대가 파노라마 전망으로 펼쳐진다. 주변으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겨울에도 운치가 좋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옥정호는 오봉산·국사봉·회문산 등이 두르고 있고, 특히 오봉산과 국사봉이 호수를 감싸 안은 듯한 지형으로 풍광이 뛰어나 사시사철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임실의 명소다. 호수 중앙의 붕어섬 주변으로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가 백미로 꼽힌다. 2022년에 ‘옥정호 출렁다리’(동절기 시설 점검으로 2월 28일까지 운휴)가 더해지며 ‘붕어섬’과 함께 임실 9경 중 하나로 떠올랐다. 시인은 “옥정호 물길을 곁에 두고 달리는 옥정호 순환 드라이브 코스가 좋다”고 추천했다. “전주에 나가 살 적에 진메마을에 오갈 때마다 아내랑 일부러 옥정호 순환 드라이브 코스로 많이 다녔어요. 벚꽃 필 때가 가장 예쁜데, 겨울엔 한적해서 고요한 풍경을 감상하기에도 좋습니다.” 옥정호 주변으로는 12㎞(마암리 버스정류장~용운리)에 이르는 ‘물안개길’이 조성돼 있어 호수의 풍광을 가까이서 감상하기 좋다. 옥정호 전망대 중 시인이 몰래 찾는 곳은 ‘구름바위길’ 부근이다. 인근 정자에선 옥정호와 붕어섬이 파노라마 전망으로 펼쳐진다.
옥정호를 지나는 ‘운암교’ 부근의 ‘섬진강댐 물문화관’(무료 관람)도 들러볼 만하다. 섬진강댐의 역할과 기능을 알리고 물 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조성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섬진강댐뿐 아니라 섬진강의 옛 풍경, 섬진강과 관련한 전래 동화, 섬진강을 배경으로 한 문학 작품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상설 전시관 입구에선 섬진강을 오가던 ‘줄배’가 맞이한다. 시인은 “지금은 줄배가 오가는 걸 쉽게 볼 수 없는데, 옛날엔 이 줄배를 타고 섬진강을 건너다녔다”고 했다. 교과서에도 실린 전래 동화 ‘오수의 개’ 이야기를 영상으로 감상하고, 직접 시를 써보는 ‘나도 작가’ 체험도 기다린다. 섬진강 관련 시가 나오는 화면에 시인의 대표 시와 생가가 있는 진메마을 이야기가 등장하자 시인은 멋쩍은 듯 웃으며 자리를 떴다.
운암교 부근 '섬진강댐 물문화관' 상설전시실에 전시된 '섬진강 줄배'. 시인은 "예전엔 이 줄배를 타고 섬진강을 건너기도 했다"며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섬진강댐 물문화관' 부근에 있는 '강남참게장'은 시인이 손님 방문 시 가는 한식 식당 중 하나다. 깔끔하고 정갈한 밥상도 좋지만, 창문 너머로 옥정호와 '마암초등학교'(옛 마암분교)가 보인다. 시인에게 마암분교는 교사로서 추억이 많은 곳이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창우가 운영하는 식당이 개인 사정으로 문을 닫아 대신 식사하러 간 섬진강댐 물문화관 근처의 식당 ‘강남참게장’ 집은 손님 방문 시에 찾는 식당 중 하나다. 창문 너머로는 옥정호가, 그 너머로는 멀리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마암초등학교도 보인다. 시인은 정갈한 밥상을 앞에 두고 흐뭇한 눈빛으로 ‘마암분교’ 시절을 떠올렸다. “덕치초등학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마암분교 선생일 때가 요즘 말로 ‘리즈 시절’이었다”고 했다. 섬진강 시인이 ‘시골 학교 선생님’으로도 알려지며 여러 지자체와 기업에서 수학여행 등 후원이 이어지던 때였다. 스무 명 남짓한 전교생, 교직원과 함께 크루즈 여행도 다녀오고, 고(故) 윤석화 등 유명인이 참여하는 분교 음악회도 열었다. “무엇보다 마암분교 시절엔 시골 오지에 사는 학생들과 함께 평생 잊을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 학생에게 (자신이) 마냥 좋은 선생님인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한번은 순창에 있는 목욕탕에 갔는데, 한 건장한 남성이 제자라며 ‘선생님, 제가 등을 밀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서 얼굴을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했죠. 그래서 ‘혹시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것 있느냐?’라고 물어보니 ‘없습니다’라고 하기에, ‘그러면 밀어라’라고 했어요. 하하!”
◇호수 마을에서 마주한 詩心
옥정호를 가까이 둔 호수 마을에도 “반짝이는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한다. 맑은 날 윤슬(물비늘·잔잔한 물결이 햇살 따위에 비치는 모양)로 빛나는 수변 풍경을 감상하기에 좋은 포인트가 여러 곳 있지만, 요즘 같은 겨울에 추위를 피해 부담 없이 가볼 만한 곳은 운암면 브런치 카페 ‘코티지683’이다. 시인은 “아내가 음악 감상을 위해 즐겨 찾는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그랜드피아노가 놓인 카페에선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사장 내외와 가볍게 안부를 나눈 시인은 통창 너머 호수가 내다보이는 자리로 안내했다. “맑은 하늘에 바람이 좀 있는 날에 가만히 호수를 보고 있노라면,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가 보여요. 저짝에서 물결이 일었다가 또 조금 뒤엔 저짝에서 물결이 일었다가 또 조금 뒤엔 더 멀리 저짝에서 물결이 이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옥정호와 인접한 호수 마을에도 전망 포인트들이 숨어 있다. 그중 운암면 브런치 카페 '코티지683'은 옥정호 전망뿐 아니라 음악 공연도 하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아내와 함께 음악 감상하러 종종 찾는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코티지683' 마당 한쪽엔 옥정호 전망 공간이 숨어 있다. 시인은 "윤슬이 반짝이고, 노을이 더해질 때가 특히 아름답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따뜻한 바닐라라테 한잔하며 시인은 문득 “정말 좋아하는 시”라며 스마트폰 속에 저장해 두었던 초등학교 1학년 제자의 동시 한편도 읊어주었다. “이거는 신기한 일이다 / 엄마가 집에 오다가 큰 배추가 차도에 있었다 / 차가 발불(밟을)까봐 우리 집에 갔고(갖고) 왔다 / 아빠가 조타고(좋다고) 미소를 지었다”. 시가 끝나기도 전에 시인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이 얼마나 멋진 시예요. 이 시에선 ‘아빠가 조타고 미소를 지었다’가 말하자면 포인트예요. 시 쓰기는 생략과 건너뛰기가 잘돼야 하는데 이렇듯 어린 학생들이 쓴 동시가 재미있는 건, 어른들처럼 복잡한 생각을 안 하고 건너뛰기를 잘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하니까 건너뛸 수 있고, 그래서 동시가 재미있어요.”
생략, 건너뛰기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단순함, 단조로움의 예찬으로 이어졌다. “한평생 시골에서의 삶이 단조롭고 따분할 것이라는 편견도 있지만, 단조롭기 때문에 욕망의 충돌이 적고 평온하다”는 게 시인의 말이다. “전주에서도 살아봤지만, 도시가 복잡한 게 아니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한 겁니다. 생각하는 게 다 나 같지 않으니 그 안에서 여러 욕망에 휩쓸리기 쉽지요. 또 도시를 채우는 것들이 모두 사고 싶은 욕망, 먹고 싶은 욕망 등 욕망과 관계돼 있어서 도시에서는 단순해지기가 참 어려워요. 그렇다고 ‘시골이 무조건 살기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해력을 가진 것들의 천국, ‘섬진강’으로
오후의 햇살이 느슨해질 무렵 시인은 다시 진메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겨울 철새 무리를 구경할 차례다. 시인은 “섬진강의 겨울은 철새 덕분에 지루하지 않다”고 했다. 철새들이 날아가는 방향을 따라가니 어느새 ‘시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시인의 길은 김용택 시인이 쓴 섬진강 관련 시비들이 이어지는 구간이다. 섬진강 문학 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이자 섬진강 자전거 길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길이다. 시인이 말한 대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호사비오리’ 무리가 날아와 겨울 햇살 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에 내려 앉았다. 호사비오리는 우리나라에서는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으로 지정된 국제적 희귀종이다. “쟤네(철새)는 10월에 와서 진달래꽃 필 무렵에 사라져요. 그때까지는 저도 카메라를 들고 부지런히 새들을 찍으러 다녀요. 저기 저 머리에 빨간 깃털이 보이는 것이 암컷이고, 그 옆에 까만 깃털이 보이는 것이 수컷이에요. 지켜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수십 년을 보아온 풍경이어도 자연은 매일 바뀌기 때문에 시인에겐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다. “작년에 안 보였던 것들이 올해는 보이고, 점점 몸을 낮춰 작은 것들과 눈을 맞추다 보면 깨닫게 돼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이 이 거대한 지구를 지탱한다는 것을. 아, 그나저나 이거(호사비오리 무리) 소문나면 여기저기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올 텐데 이것 참 걱정이네!”
김용택 시인의 집 앞으로 날아가던 철새 무리. 겨울마다 새로운 새들이 찾아와 매년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올 겨울 섬진강을 찾은 희귀종 겨울 철새 '호사비오리' 무리. 김용택 시인은 "철새 탐조를 하다 보면 무리에 섞인 원앙이 관찰될 때도 있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다시 회문재로 돌아오는 길에 시인은 “호사비오리가 내일도 이곳에 머무를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으니 미리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자연과는 그 어떤 약속도 할 수 없기에 내일 걱정은 내일 하자고. 시인은 그렇게 겨울 강에서도 ‘별일 없이’ 시어(詩語)를 건져 올리고 있었다.
그래픽=송윤혜 |
“완주 미술관서 문화 충전하고, 담양으로 ‘빵지순례’도”
시인 김용택 추천 진메마을 주변 가볼 만한 곳
완주에 있는 '전북도립미술관'은 인근에 있는 소도시 주민들에게도 단비 같은 문화 충전소다. 김용택 시인의 '소도시 생존 코스'에도 올라가 있는 곳. 시인은 "집에서도 멀지 않아 즐겨 찾는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전북 임실에서도 시인 김용택이 사는 덕치면 진메마을 가까이 있는 강진면 갈담의 ‘섬진강다슬기마을’은 시인이 ‘다슬기 손수제비’나 ‘다슬기 칼국수’(모두 1만원)를 먹으러 가는 맛집이다. “저렴하고 양도 많아 외지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도 반응이 좋았다”는 곳이다. ‘갈담리 버스정류소’ 부근에서 파는 붕어빵도 맛있단다. “지나는 길이면 넉넉하게 사 가지고 와 마을회관 어르신들과 나눠 먹는 것도 행복입니다.”
덕치면과 인접한 순창·남원·정읍·담양과 전주도 자주 간다. “이따금 강연 의뢰가 들어오면 대도시로도 나가 콧바람을 쐬지만, 소도시인 임실에서 살면서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건 순창읍내가 가깝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마트나 병원 등 편의 시설이 있는 순창은 ‘생활권’, 관광 명소가 많은 담양이나 전주는 나들이하는 기분으로 가는 도시다.
거의 매일 섬진강을 걷지만, 아내와 둘이 데이트하는 기분을 내고 싶을 땐 ‘김용택의 작은 학교’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담양 ‘관방제림’을 찾는다. 관방제림은 관방천에 있는 제방의 풍치림을 일컫는다. 관방천 주변으로 조성돼 있는 약 2㎞의 풍치림 구간엔 추정 수령 300~400년에 달하는 나무들이 빼곡하게 이어진다. 큰 나무 사이로 산책로가 잘 닦인 관방제림은 사람들 구경하며 걷는 재미가 있는 곳. 녹음이 무성한 계절도 좋지만, 겨울 설경도 아름답다. 산책 후엔 베이커리 카페 ‘베비에르 담양점’을 즐겨 찾는다. ‘광주 빵지순례 맛집’으로 유명한 ‘베비에르’ 분점이다. 시인은 “빵도 맛있고, 좌석이 다양해 이따금 노트북을 들고 가 글을 쓰기도 한다”고 했다.
시인은 “임실에 살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대형 서점이 없는 것”이라며 “요즘 도시에선 전날 저녁까지 책을 주문하면 새벽에 받아볼 수 있다던데, 도시 사는 건 안 부럽지만, 책 새벽 배송이 솔직히 부럽긴 하다”고 했다. 책을 보고 싶을 땐 도서관과 대형 서점이 있는 전주 시내로 나간다. 특히 전주는 시인의 아내가 독서 모임을 하는 곳이어서 종종 따라나선다고. 오가는 길에 완주에 있는 ‘전북도립미술관’에 들러 전시도 즐긴다. 미술관 주변에 맛집이나 카페들이 모여 있어 반나절 나들이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도시적인 맛’이 그리울 땐 가까운 순창읍내로 향한다. “파스타와 피자를 좋아한다”는 시인이 “딸이 월급을 받을 때나 작가 수입이 들어올 때 가족 외식 장소로 자주 간다”고 소개한 곳은 순창읍 ‘돈까스클라스’다. ‘지리산 해발 500m 고원에서 키운 흑돼지 생고기만 엄선해 사용한다’고 내세우는 돈가스 맛집이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카르보나라 파스타, 고르곤졸라 피자도 맛있다고 소문나 있다. 시인은 “도시에선 흔한 게 프랜차이즈 맛집이지만, 소도시에 살면 보장된 맛을 즐길 수 있는 프랜차이즈 치킨집 하나도 소중하다”며 웃었다. 어쩌면 ‘김용택의 즐겨 찾기’는 소도시에 사는 시인의 현명한 생존법, 생존 코스일지도.
[박근희여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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