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맑음 / -3.9 °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박정훈 칼럼] 간첩, 없는 게 아니라 ‘어쩌라고요’ 하는 것

조선일보 박정훈 논설실장
원문보기
미국이 잡은 간첩이
1년 새 35% 늘었다…
유독 미국에만 간첩이
들끓는 건 아닐 텐데
우리 스스로 손발 묶고
눈감고 있을 뿐이다
‘종북 몰이’ 운운하며 국가보안법 폐지안을 제출한 민형배 등 범여권 의원 31명은 2023년 민노총 간첩 사건의 판결문을 꼭 읽어야 한다. 민노총 조직쟁의국장 신분으로 간첩 활동을 벌이다 적발돼 징역 9년형 최종 선고를 받은 석모(55)씨의 판결문엔 그가 북에 보낸 충성 맹세문 5건이 실려 있다.

“사무치게 그리운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땅에 낙원을 펼쳐 주시려 생신 날도 쉬지 않으시며 불면불휴의 현지 지도 길에 오르셨던 아버지 장군님” “우리 이남의 전사(戰士)들을 값 높게 호명해주신 김정일 장군님의 영정 앞에 두 손 모아 영생을 노래하며” “인자한 미소와 따사로운 품으로 안아 주셨던 그 사랑이 그립고 또 그립습니다”.... 2022년 4월 보낸 마지막 맹세문에선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 받들어 대를 이어 충성하자”고 썼다. 김씨 왕조의 노예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거대 노동 단체의 핵심에 앉아 있었다. 이것이 국보법 폐지론자들이 부정하고 싶은 우리의 현실이다.

북한 통일전선부 산하 문화교류국이 민노총 전·현직 간부에 내린 지령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해군 2함대 사령부, 화력·LNG 저장 시설, 평택항 부두 배치도’며 ‘평택·오산 공군기지 시설·군사 장비’에 관한 자료를 보고하라는 식의 지시를 보냈다. ‘유사시 청와대 등 주요 통치 기관 마비를 준비’하라거나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기습 점거 같은 물리적 타격 투쟁’ ‘김정은 숭배 열풍을 고조시키는 사업’을 지시하는 내용도 있었다. 실제로 석씨는 평택·오산 기지 군사 장비와 패트리엇 미사일 포대, 정찰기 착륙 장면, 탄약고 건설 현장 등을 촬영한 영상·사진을 수집한 사실이 드러났다.

민노총 사건은 국가정보원이 오래 공들인 간첩 수사의 정석(定石)이었다. 공개 수사로 전환한 것은 2023년이었지만, 그 전부터 6년 이상 용의자들을 추적한 것으로 판결문에 기록돼 있다. 국정원 요원들은 2017년 캄보디아에서 석씨 등이 북한 공작원과 만나는 현장을 4박 5일 감시하며 촬영했다. 2018년엔 중국 광저우, 2019년엔 베트남 하노이 접선 장면을 채증하는 데 성공했다. 재판부에 제출된 사진·동영상만 수백 건에 달했다. ‘조작’이라며 반발하던 친북 세력도 빼도 박도 못할 물증 앞에선 꼼짝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영화와도 같은 이런 식의 간첩 검거는 더 이상 보기 힘든 옛날 얘기가 됐다. 문재인 정부가 2024년부터 국정원의 대공 수사권을 폐지했기 때문이다. 민노총 사건처럼, 국정원 요원들이 대북 용의자의 접선 현장을 추적·채증하는 것이 법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석씨 등의 접선 상대가 ‘문화교류국 소속 리광진’임을 특정해낸 휴민트(인적 정보) 능력도 활용하기 어려워졌다. 63년간 축적된 국정원의 노하우를 사장(死藏)시킨 것이다. 북의 대남 공작 부서는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민주당은 대신 경찰이 수사하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이 국정원만큼 역량을 갖추려면 얼마나 세월이 걸릴지 모른다. 공개 조직인 경찰은 비밀·잠복 수사가 기본인 간첩 사건에 구조적 한계가 있다. 민노총 사건은 국정원이 6년여 추적 끝에 밝혀냈다. 1~2년마다 수시로 보직이 바뀌는 경찰이 몇 년씩 걸리는 장기 수사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것도 모자라 민주당 정권은 군 방첩사까지 폐지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간첩 수사 시스템을 축소하면서 간첩의 범위를 북한 외 적성국으로 확대하는 간첩법 개정안은 아직껏 국회에서 붙잡고 있다.


간첩은 북한에서만 오지 않는다. 지난주 이재명 대통령은 쿠팡의 정보 유출 사건이 중국인 소행임을 지적하는 기자 질문에 “어쩌라고요”라고 했다. 불쾌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대통령은 질문이 ‘혐중’에 해당된다고 본 모양이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중국인에 의한 민감 정보 탈취 시도가 눈에 띄게 늘었다. 중국인들이 드론을 띄워 국정원 청사를 찍고, 제주 해군사령부, 수원 공군 비행단, 부산항 정박 미 항공모함 등을 촬영하는 일이 잇따랐다. 정보사 군무원이 중국에 포섭돼 블랙 요원 리스트를 통째로 넘긴 사건도 있었다.

쿠팡 사건 역시 아직 내막이 드러나지 않았다. 중국으로 건너간 혐의자가 내국인이 아닌 탓에 수사 당국은 신병 확보조차 못한 채 애를 먹고 있다. 쿠팡 사건의 범인이 중국인이라는 것은 ‘혐중’ 문제가 아니라 사이버 보안과 관련된 안보 이슈일 수 있다. 중국인 소행이기 때문에 더 경계해야 할 사건 앞에서 “어쩌라고요”라고 반문하는 대통령의 인식이 더 충격적이다.

지난해 미국이 전년보다 35% 많은 적대국 간첩을 체포했다는 외신 뉴스가 있었다. 잡힌 간첩들은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에 미 FBI(연방수사국) 국장은 가장 먼저 북한을, 그 다음으로 중국·러시아를 들었다. 미국에만 유독 간첩이 들끓을 리 없다. 간첩이 없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손발 묶은 채 “어쩌라고요” 하고 있을 뿐이다.

[박정훈 논설실장]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이해찬 건강 악화
    이해찬 건강 악화
  2. 2양현민 최참사랑 득녀
    양현민 최참사랑 득녀
  3. 3린샤오쥔 올림픽 출전
    린샤오쥔 올림픽 출전
  4. 4토트넘 수비수 영입
    토트넘 수비수 영입
  5. 5정관장 소노 경기
    정관장 소노 경기

조선일보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당신만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