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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시선] 다우닝가 10번지에 '러브 액츄얼리'는 없었다

연합뉴스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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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 대미 외교에 불만 확산…스타머 총리는 '물밑외교' 강조
2025년 9월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 하는 미영 정상[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2025년 9월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 하는 미영 정상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런던=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리처드 커티스보다는 키어 스타머가 책임자인 게 낫다. 우리 모두 크리스마스에 '러브 액츄얼리'를 봤고 훌륭한 영화지만, 국제 외교에 효과적인 가이드는 못 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덴마크령 그린란드 합병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관세 부과를 위협하다가 21일(현지시간) 이를 갑자기 철회하며 나흘간 영국을 롤러코스터에 태우는 동안 더글러스 알렉산더 영국 스코틀랜드 담당 장관은 언론에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대미 관계로 곤경에 처할 때마다 거론돼온 '러브 액츄얼리'(2003)는 영국 로맨틱코미디 거장 리처드 커티스 감독이 쓰고 만든 영화다.

배우 휴 그랜트가 연기한 젊은 독신의 영국 총리는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실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 협상에서 안하무인으로 굴다가 마음에 둔 총리실 여직원까지 희롱하자 외교적 저자세를 분연히 벗어던진다.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 나선 총리는 대통령이 양국의 '특별한 관계'를 언급하자 "이건 나쁜 관계다. 대통령은 원하는 대로 다 가져가고 영국에 중요한 것들은 깡그리 무시한다"고 일갈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작지만 위대하다"며 "셰익스피어와 처칠, 비틀스, 해리 포터, 데이비드 베컴의 오른발이 있는 나라"라고 일장 연설을 한다. 보좌진의 얼굴엔 자랑스럽다는 듯 미소가 번진다. 마법사도, 용도 나오지 않지만, 이보다 더한 판타지 영화가 있을까.


지난 나흘간 스타머 총리가 보인 모습은 '러브 액츄얼리'와는 거리가 있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위협에 맞서 유럽연합(EU)에 '무역 바주카포' 통상위협대응조치(ACI) 발동을 요구한 직후, 스타머 총리는 대미 보복 관세 가능성을 배제하고 차분한 대응을 촉구했다.

2020년 제1야당 중도좌파 노동당 대표가 된 순간부터 스타머 총리가 고수해온 이념은 실용주의다. 오직 실리를 챙기겠다는 자세로 당내 진보진영의 반발을 사면서 중도화 노선을 걸었다. 집권 후 야권의 포화를 맞으면서도 중국과 관계 개선에 나섰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사상 최초의 영국 왕실 2번째 국빈 초청이란 선물을 안기면서 공개적인 비판은 일절 삼갔다.

실리는 있었다. 중도화 노선은 노동당의 정권 교체를 도왔다. 트럼프 대통령과는 의외의 라포가 형성됐다. 이를 바탕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불화를 일시 봉합하며 우크라이나 관련 유럽의 입장을 어필했고 미·영 무역 합의까지 성사시켰다.


지난해 5월 영국이 미·영 합동 군기지가 있는 차고스 제도를 모리셔스에 반환하기로 한 협정도 그렇게 끌어낸 소득이었다. 지난해 2월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차고스 제도 반환에 협조하겠다고 했고, 석 달 뒤 협정이 체결되자 미 국무부는 환영 성명을 냈다.

양국 우호관계의 상징이던 차고스 제도 반환 협정은 몇 개월 만에 트럼프 대통령이 얼마나 쉽게 말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린란드를 놓고 충돌하자마자 이 협정이 영국의 '대단한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2025년 6월 16일 트럼프 대통령이 떨어뜨린 미영 무역협정 서류를 줍는 스타머 총리[AFP/게티이미지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2025년 6월 16일 트럼프 대통령이 떨어뜨린 미영 무역협정 서류를 줍는 스타머 총리
[AFP/게티이미지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그러는 동안 스타머 총리의 영국 내 입지는 더 흔들렸다. 정부 출범 초기부터 우익 영국개혁당, 중도 자유민주당, 진보 녹색당에 갈래갈래 빼앗기며 수직 낙하한 지지율을 그나마 부여잡고 있던 외교 성과마저 의구심을 산 것이다. 영국의 막대한 비용 부담을 이유로 차고스 반환에 반대해온 야당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공세에 바로 합세했다.


스타머 총리의 '실용주의'와 '신중함' 전략에도 의문이 커졌다. 집권당 안팎의 진보진영에서는 이미 '러브 액츄얼리'의 순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져 왔다.

중도 성향인 원내 제3당 자유민주당의 에드 데이비 대표는 21일 가디언 기고에서 '국제 깡패처럼' 구는 트럼프가 백악관에 있는 한 양국의 특별한 관계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면서, 표적화한 조치와 관세로 영국만의 '무역 바주카포'를 마련해 맞서자고 스타머 총리에게 촉구했다.

'저자세'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듯, 스타머 총리는 21일 의회 총리질의(PMQ)에서 "영국은 관세 위협 아래 그린란드의 미래에 관한 원칙과 가치를 양보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제까지 대미 발언 중 가장 강경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스위스 다보스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극적으로 관세를 철회했다. 스타머 정부가 주장하는 '차분한 물밑 외교'가 통한 것이든 아니든, 유럽은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됐다.

그러나 유럽이 정말 위기를 피한 것일까.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얼마나 쉽게 동맹국을 공격할 수 있는지, 얼마나 쉽게 판을 뒤집어버릴 수 있는지 재확인됐을 뿐이다. 다음 번 폭탄은 언제든지 닥쳐올 수 있다.

결국 현 상황에서 대서양 관계의 근본적인 문제는 힘의 불균형일 것이다. 약자가 국제 질서와 원칙을 아무리 요구한들 강자가 수용할 생각이 없는 상황, 트럼프 대통령이 늘 쓰는 표현대로 유럽에 '카드'가 별로 없는 상황이라면 '협상의 기술'이 무엇이든 얼마나 쓸모를 발휘할 수 있을까.

cheror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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