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70). 여러 작품의 주인공이 한데 모인 신작 ‘이야기를 들려줘요’를 두고 출판사 쪽은 “스트라우트 세계관의 결정체”라고 소개한다. ⓒLeonardo Cendamo, 문학동네 제공 |
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70)의 새 장편 소설 ‘이야기를 들려줘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부터 꼽자면 화자가 ‘우리’라는 사실이다. 윌리엄 포크너(1897~1962)의 최고 단편으로까지 꼽히는 ‘에밀리에게 장미를’ 등 1인칭 복수 대명사가 화자인 소설이 드물망정 없진 않다. 개중 ‘이야기를 들려줘요’에서 “우리”는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데서 한층 차별화한다.
“우리가 앞서 언급했듯” 따위 격식으로 이야기를 환기시켜 연결하고, “우리는 이쯤에서 (…) 알아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며 함께 살펴 듣길 청유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기로”쯤 되면 독자의 심사는 고약해지고 마는데, ‘우리가 아는 한’의 우리에 ‘나’는 없고, “우리”는 지속해 정체불명이다. 그러다 차차로 그 독자가 ‘우리’로 포섭되어 가리란 게 이 작품의 별미다. 첫 단락이 이랬다.
“이것은 밥 버지스의 이야기다. (…) 우리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그는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만큼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자신의 삶에 기록으로 남길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이 있다고 믿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것이 있고, 그런 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있다.”
장삼이사 우리가 이미 “우리”로 아울러져 소설은 시작되고 있었달까. 뒤에 묘사되는바 “기록되지 않은 삶”들에 대한 애착과 연민이 이 작품의 태도다. 또한 끝없이 주고받고 퍼져 나가는 이야기가 ‘우리’를 구성하고 욕망과 상실, 선과 악, 실수와 후회, 상처로 가득한 우리 세계조차 견디게 한다는 걸 에두른다. 간결한 듯 심오한 스트라우트 문장이 거듭될수록 이는 진리로서 선명해지고 단단해진다.
이야기를 들려줘요 l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문학동네, 1만9800원 |
기실 번역서 제목만으로 이 소설의 톤을 가늠하기 어렵다. 작가를 ‘조용한 소설’의 대가로 아는 독자라면 나직한 속삭임에 가깝겠거니 할 텐데 원제에선 좀 더 데시벨이 오르고 ―‘Tell Me Everything’(텔 미 에브리싱)이다― 작중에서 말의 진짜 온도가 드러난다. “내게 모든 걸 말해줘요”, 예순여섯살 여성 루시가 예순다섯 밥에게 ‘갈급’하는 말이다. 루시는 전남편 윌리엄과 여행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밥 또한 아내가 있다. 가난과 함께 “그토록 비참한 환경”에서 자랐고 훗날 유명 작가가 된 루시와 아버지를 숨지게 한 형의 실수와 죄의식을 제 것마냥 여생 짊어지고 산 변호사 밥이, 그보다 더 복잡하고 지난한 삶의 여로에서 재회하여 하나의 사랑, 하나의 관계, 하나의 이야기를 막 발화하는 순간의 동태와 격정이 저 말엔 압축되어 있다. 이 대목과 같이, ‘이야기를 들려줘요’에는 고요하게 비등하는 파토스 가득하므로, 500쪽 한 권이 길지 않다. 스트라우트가 그간 쓴 소설 속 주요 인물이, 마치 그 소설들을 쓴 20년 동안 저마다 이미 오고 있었다는 듯, 메인주 한 마을 크로스비 타운에 다 모인 덕분일까.
작위의 혐의를 무릅쓰고 인물들은 오래 작정한 양 당도해 있고, 그들이 얽히고설킨 세계에서 고통은 더 적나라해지고 사랑은 찬란해진다. 아무렴 축은 스트라우트의 전작 ‘버지스 형제’의 밥 버지스, 그리고 차례로 부커상 후보에 오르며 “문학사에 남을 불후의 캐릭터”란 평가까지 얻었던 소설 ‘내 이름은 루시 바턴’과 ‘오, 윌리엄!’의 화자 루시가 나누는 우정과 사랑 되겠다. 재혼한 밥과 두번 이혼 뒤 첫 남편과 동거 중인 루시의, 말하자면 황혼의 감정적 불륜으로 뵐 법한데 ―작중 인물들의 말버릇대로라면― 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가족과 트라우마, 사랑과 상처, 사건과 성찰의 유기성을 섬세하게 꿰뚫어 온 스트라우트식 소설다울 뿐이다.
반려자에게도 못할 이야기를 아껴 전하고자 서로를 기다리다 터뜨리는 둘의 대화는 지난 모든 상처를 각기 보여주고 온전히 보듬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내게 모든 걸 말해줘요”(루시)나 “내게 뭐든 말해줘요”(밥)는 ‘모든 걸, 무엇이든 듣겠다’는 주술이어서, 마침내 이렇게 바뀌어 간다.
밥이 루시를 돌아보았다. “루시―” 그리고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뭐라고 하는지 들려요.” 그녀가 얼굴에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어요.” “알아요. 하지만 당신 말을 들었어요.”
소설의 골격이긴 해도, 루시와 밥이 ‘우리’는 아니다. 알코올 의존자가 되고 연하 남편의 간음까지 목도(?)하게 되는 밥의 첫번째 아내 팸, 밥을 통해 루시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아흔살 올리브(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의 주인공), 올리브의 절친으로 팬데믹 기간 다쳐 입원해 있는, 해서 루시와 나눈 이야기를 올리브가 더더욱 전해주고 싶은 대상으로 나오는 이저벨 굿로(소설 ‘에이미와 이저벨’), 그리고 이 모든 장노년들과 대체로 갈등 반목하는 자녀들도 ‘우리’가 아니긴 마찬가지다. 80대 모친을 살해했다고 의심받는 59살 사회 부적응자 아들 매트(밥이 변호한다), ‘가정 성폭력’ 피해자로서 막상 자살로 진실을 드러내는 딸 다이애나도 물론이다. ‘우리’는 그조차도 기록되지 않는 당대 우리다.
가령, 소설 캐릭터로 그 유명한 올리브가 그 유명한 루시를 작중 처음 만나 들려주는 옆 마을 얘기에 ‘우리’가 있다. 때는 1920~30년대, 사랑했으나 잘 사는 남자네 반대로 스티븐과 헤어지게 된 여자 사라. 급히 결혼한 사라의 남편은 아버지의 폭력 아래 자랐던 인물이다. 반전 없이 스티븐은 의사가 됐고 갑부의 딸과 결혼해 몇년 뒤 고향을 찾는다. 유명 인사의 동정을 알리던 지역지에 스티븐의 어린 두 딸의 이름도 적혀 있으니, 올리브와 아이사다. 스티븐과 사라가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짓자 했던 바로 그 이름. 죽은 사라의 핸드백 속 일생 간직되어 온 그 신문 기사 조각을 발견한 이가 사라를 원망했던 딸, 루시 앞에 앉아 말하는 올리브다.
‘두 부부가 평생 유령들과 살았다’며 눈물짓던 루시는 하여 밥과 애오라지 사랑하게 될까. 주인공들이야말로 이름없는 주변부 ‘우리’를 따라 산다. ‘우리’가 진짜고, 주인공들이 삽화다.
앞서 언급한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은 미국 남부 몰락한 가문의 딸에 관한 비밀과 소문의 화자로 온 마을 사람들이 뭉친 것이다. 이제 안다는 듯 배제와 억압에 가담하는 ‘우리’와 달리, 루시는 말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말 알지는 못해요.” 이야기가 필요하고 이야기로 연결되고, 그럼에도 또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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