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현과 김기창의 결혼사진, 1946, 개인소장. 박래현이 앞에 서서 당당한 포즈를 취한 것이 인상적이다. |
‘귀먹어리 소년 미전(美展)에 입선’.
조선일보 1931년 5월 24일 자 1단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주인공은 18세 소년 김기창(1913~2001). 청각 장애를 뜻하는 당시 ‘귀먹어리’ 표현이 비칭(卑稱)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에 귀가 먹어서 불행한 날을 보내이는 금년 십팔세 된 소년이 김은호(金殷鎬)씨의 문하에서 동양화를 연구하여 오든 바 이번 미전에 출품한 바 입선이된 김기창(雲圃 金基昶)군은 불구자인 우에 집안이 넉넉치 못한 터에 그의 노력에는 누구나 감탄한다는데 군은 시내 승동(勝洞)보통학교 당국자의 양해를 얻어 그 학교를 마쳤으며 재학 당시에는 정구선수였고 그외에 동요(童謠)도 잘 쓴다는데 누구나 이의 천분을 생각하고 후원자가 나서기를 바란다 한다.”(1931년 5월 24일 자 석간 5면)
18세 김기창 미전에 입선. 1931년 5월 24일자 5면. |
김기창은 등단 초기엔 호를 운포(雲圃)라고 했다. 1930년대 기사에선 ‘운포’로 나온다. 매년 미전에 입선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37년엔 동양화 ‘고담(古談)’으로 특선에 올랐다. 당시 기자는 ‘시내 운니정(雲泥町) 십팔번지’ 김기창의 집을 찾았다. 김기창은 필담으로 말했다.
1937년 5월 14일자 2면. |
김기창은 이후 4년 연속 특선하며 역량을 인정받았다. 세 차례 잇달아 특선을 했던 1939년 기자가 다시 김기창 집을 찾았다.
운명의 화가 김기창. 1939년 6월 8일자 5면. |
운보 김기창 화백의 '예수의 생애' 연작 중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쿰란출판사 |
김기창은 “결혼은 단념”한다고 했으나 운명의 짝이 나타났다. 7세 연하 화가 박래현(1920~1976)과 1946년 결혼했다. 김기창·박래현 부부는 이후 여러 차례 ‘부처(夫妻) 회화전’을 열었다. 이 무렵 김기창은 호를 운보(雲甫)로 바꾸었다. 박래현은 호를 ‘우향(雨鄕)’이라 했다. 1956년 5월 17일 자 4면에서 운보·우향 부부의 전시에 대해 이례적으로 서양화가 김주영·정규, 비평가 이경성, 시인 장호·고원 등 5인이 각각 평가한 글을 실었다.
김기창 박래현 부처전 종합평. 1956년 5월 17일자 4면. |
“운보·우향의 부처전(夫妻展)은 여러 가지 문제를 제시했다고 믿는다. 우선 동양화의 특성을 깨뜨리고 표현의 현대성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탈피 작용을 꾀하기 위한 저항이라고 하겠다.”(김주영)
“동양화의 세계성 확립에 선구적 역할을 하는 분들이 바로 운보와 우향 부처가 아닌가 한다. 운보 화백의 강렬한 시대 정신이 주는 중량과 자유분방한 조형성은 우리에게 그윽한 안도감을 준다.”(고원·이상 1956년 5월 17일 자 4면)
김기창, ‘군마도’, 1955,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김기창은 뛰어난 기량의 화가로, 특히 동물화의 일인자였다. 약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화면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진하는 말들의 힘찬 운동감이 압권이다. |
김기창은 등단 초기 자신의 결심대로 평생 화업(畵業)에 정진했다. 1976년 아내 박래현이 세상을 뜬 후 자신을 대표하는 ‘바보 산수’가 탄생했다. 김기창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우향을 잃은 후 2, 3개월쯤 지나 나는 어떤 영감에 사로잡혀 새벽 3시에 일어나 작품에 몰두하곤 해요. 그것이 민화적인 바보 산수(山水)입니다.”
바보산수. |
1977년 1월 12일자 5면. |
김기창은 자신의 화업이 세 사람의 여인 덕분이라고 했다.
“내 평생 이 길만을 걸어온 것은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아내의 눈물겨운 희생 때문이었지요. 특히 글을 가르쳐주고 그림을 그리게 한 어머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우향의 보살핌이 아니었던들 내가 무얼 하고 있을지?”(1977년 1월 12일 자 5면)
2001년 1월 23일 김기창은 아내를 따라갔다. 후배 화가 이종상 서울대 교수가 추모 글을 썼다.
박래현, 김기창 합작, ‘봄’, 1956년경, 아라리오컬렉션. 사랑의 전설을 지녀 ‘부부애’를 상징하는 등나무와 그 주위에 날아든 참새의 모습을 담았다. 격렬하게 휘감아 올라간 등나무와 등꽃을 박래현이 그렸고, 주변에 어우러진 참새와 벌을 김기창이 그렸다. 박래현의 대담성과 김기창의 재치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
“선생은 구상·추상의 한계와 동양화·서양화 따위의 구차스러운 2분법으로부터 자유스러웠으며 일찍이 한국 화단의 고질적 대립 양상에서 벗어나 우리의 그림이 주인이 되는 한국적 자생 미학의 길을 열었다.”(2001년 1월 26일 21면)
[이한수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