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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세상]산황산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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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해 온 고양시에 적응해가던 중, 산황산이 근처에 있단 걸 알게 됐다. 그 숲을 없애고 그 자리에 골프장이 증설된다고 했다. 산의 절반을 없애 9홀 규모의 골프장이 건설되어 이미 운영 중이다. 이제 남은 절반도 없애 총 18홀 규모로 확장한다는 것. 단체의 상근활동가를 그만두고 이주해 온 나는 어딘가 고장 난 채였다. 파괴가 만연한 현실을 바로 보는 것도, 내 삶을 정갈하게 돌보는 일도 쉽지 않았다. 고양시는 내가 도망쳐 온 곳이었다.

이후 내가 일하는 책방에 몇명의 어른과 아이들이 방문했다. 산황산을 지키고자 하는 주민들이었다. 전업 활동가가 아닌, 시민분들의 활동은 인상적이었다. 기후위기 시대에 당장 빙하가 녹는 것을 막을 수는 없더라도 자신이 사는 지역의 산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아는 것. 여기서부터 활동은 시작되고 있었다. 산황산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미 10년도 넘게 시민들이 반대해온 일이라고 했다. 산황산 골프장 증설 사업 계획은 2025년 2월 ‘장기미집행 도시계획시설 해제권고안’이 의원 만장일치로 가결되어 골프장 증설은 취소돼야 마땅했다. 그러나 고양시는 돌연 태도를 바꾸었고, 2025년 6월 골프장 증설 계획은 갑작스럽게 승인됐다. 반대해온 시민들은 답답해했다.

은성님도 산황산을 지키는 일에 함께해요. 이 요청에 당시에는 얼버무렸지만, 이후 느낀 건 나도 산황산의 구성원 중 하나라는 연결감이었다. 산황산을 위해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알지 못하는 형편이나, 나 또한 산황산과 함께 호흡하는, 고양시에 사는 인간 거주민이다. 산황산을 거점으로 한 생태권역 안에 내가 있었다. 산황산의 파괴 앞에서, 역설적으로 산황산이 내미는 환대의 손을 본 것 같았다.

몇달 후나 되어서야 나는 그분들을 따라 산황산 산행에 동행했다. 겨울의 산은 적막했다. 잎이 떨어진 나무들, 그리고 길목마다 걸려 있던 골프장 증설 반대 메시지를 담은 팻말들을 만났다. 내겐 나무의 말을 듣는 능력이 없다. 하지만 그곳의 나무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한 계절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몇개월 후엔 연둣빛 싹을 새로 낼 나무들이었다. 참나무와 상수리나무 군락을 보았고, 숲길을 걸으면서 동물의 배설물을 보았다. 사람 주먹만 한 작은 땅굴들을 보았다. 모두 산황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동물들의 것이었다. 고라니와 두더지, 청설모, 말똥가리, 황조롱이, 딱새, 노랑턱멧새, 유혈목이… 산황산의 거주자인 이들에게 대체 누가 개발의 허락을 받았을까.

스프링힐스(Spring Hills) 골프장과 산의 경계 지대로 올라갔다. 널따란 잔디밭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봄 언덕이라는 뜻을 내세운, 숲의 무덤인 골프장. 봄이라는 계절의 이름을, 숲을 빼앗아 만든 골프장이 가져갈 수 있는 걸까. 미국의 산업화 시기 한 벌목꾼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원작의 영화 <기차의 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린 여기서 500년을 산 나무들을 베어 냈어. 본인은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영혼에 탈이 나. (…) 세상은 얽히고설켜 있어.” 나이 든 벌목꾼의 대사다. 내려오면서 만난, 산황동의 당산나무인 700년 수령의 ‘용뿔’ 느티나무를 떠올리니 유독 상상됐다. 고요하게 얽혀 있을, 알아채지 못했던 모두의 상처받은 영혼이.

윤은성 시인·기후생태활동가

윤은성 시인·기후생태활동가

윤은성 시인·기후생태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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