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혜 |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정년 퇴임을 몇년 앞두고 강원도 철원의 산자락에 밭을 구해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평생 생물학을 공부하고 가르쳐왔지만, 실험실을 벗어난 자연 속에서 생명이 자라는 모습을 제대로 보고 싶었다. 분자와 세포 같은 미시적 전공의 수준을 벗어나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생명의 변화를 통째로 지켜보고 싶었다. 자작과 산벚 등 묘목을 수백 그루 심고, 꽃과 열매가 예쁜 나무들도 매년 여러 그루씩 심었다. 물과 햇빛은 하늘에 맡기고, 비료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으며 내버려 두었는데, 허리춤에 못 미치던 묘목들이 다섯해를 지나면서 2~3미터도 넘는 성목으로 훌쩍 자랐다. 내가 한 일이라곤 끊임없이 자라는 주변의 잡초를 가끔 뽑아주는 일뿐이었다.
나무를 키우면서 흙을 가깝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나무의 변화도 신비롭지만, 그 생명을 떠받치고 있는 흙도 못지않게 경이롭다. 이래서 고대로부터 흙을 생명의 근원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인간은 흙에서 빚어졌고, 그렇기에 그 이름도 흙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다마’를 따라 ‘아담’이라 불리었다. 그리스 신화는 프로메테우스가 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빚고, 여신 아테나가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고 얘기한다. 메소포타미아 신화도 점토에 신의 피를 섞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고, 중국의 설화에서도 대지와 생명의 여신인 여와가 황토로 인간을 빚어냈다고 한다.
흙에서 인간이 빚어졌다는 서사는 단순히 비과학적인 고대 설화로 치부될 수 없는 속 깊은 진리를 품고 있다. 몸과 땅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신토불이의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생화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과 흙은 같은 구성 원소들을 공유한다. 그렇기에 흙에서 인간이 유래했다는 서사나, 지구에서 생명이 생겨났다는 명제는 서로 통하는 얘기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이름(Earth)이기도 한 이 흙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겨난 것인가?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1980년 ‘코스모스’라는 저서와 텔레비전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별 먼지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유명한 경구를 회자시켰다. 인간의 몸(또는 지구)을 이루는 모든 원소가 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핵융합과 별이 죽어가는 과정의 초신성 폭발로부터 유래했다는 과학적 사실을 시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천체물리학적 추정에 의하면, 약 46억년 전 수소와 헬륨 같은 가스, 규산염과 탄소화합물, 금속 같은 먼지들이 구름처럼 뭉쳐진 원시 태양 성운이 외부 충격에 의해 원반 형태의 회전을 하게 되면서, 질량의 중심에 태양이 생겨나고 그 주위를 도는 암석형 행성인 지구가 생겨났다고 한다.
흙은 암석이 풍화되어 생긴 무기물에, 생명 활동에서 나온 유기물이 더해지면서 오랜 기간을 거쳐 생겨난다.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풍화 과정을 거쳐 암석이 쪼개지고 점토가 형성되며, 여기에 유기물인 식물과 동물, 미생물의 사체가 층층이 쌓여 지구의 표층인 토양을 형성하게 된다.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도록 떠받치는 흙은 여러 생물체들의 협업으로 비옥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흙 속의 미생물들은 식물의 성장에 필수적인 영양소들을 공기와 무기질에서 뽑아내어 뿌리 주변에 축적한다.
지구 생명체의 핵산과 단백질에 들어 있는 질소 성분은 대기 중의 질소 가스로부터 유래한다. 생물체는 질소 가스를 직접 활용할 수 없고, 질소에 수소가 결합된 화합물인 암모니아나 산소가 결합된 질산염의 상태로 질소를 몸 안에 받아들인다. 자연계에서 공기 중의 질소 가스를 포획하여 암모니아로 전환하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존재는 질소 고정 세균들이다. 이들은 콩과 식물의 뿌리에 혹을 만든 상태로 식물과 공생하거나 아니면 자유 독립형으로 살면서 질소를 암모니아로 고정시켜 식물의 뿌리에 공급한다.
20세기 초,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고온 고압의 에너지를 써서 질소와 수소를 암모니아로 만드는 화학반응을 성공시켰다. 이를 통해 만들어진 질소비료는 농업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켜 인류가 기아를 벗어나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 녹색혁명을 가능케 했다. 1918년 하버에게 노벨 화학상을 안긴 이 화학반응은 공기 중의 질소를 암모니아로 바꾸는 데 막대한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러나 땅속 세균이 수행하는 저에너지 암모니아 생산 방법을 우리는 아직 따라 하지 못한다. 또한, 과잉으로 뿌려진 질소비료는 토양과 수계 생태계를 교란하여, 질소 고정 세균은 감소시키고 미세조류는 폭증시켜 수서생물의 질식과 물의 오염을 유발한다.
비옥한 토양은 영양분이라는 화학성분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생명체를 없앤 멸균된 흙은 식물을 제대로 성장시키지 못한다. 뿌리 주변에는 뿌리가 내는 분비물을 따라 미생물들이 모여든다. 모여든 미생물은 질소 고정도 하고, 불용성 무기 영양소를 뿌리가 흡수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하며, 생물의 사체와 난분해성 화학물질을 분해하여 자원을 순환하고, 항생물질을 생산하여 주변의 병원균을 억제하기도 한다. 서로 주고받는 공존의 생태계가 뿌리 주위에 만들어져야 식물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생명력이 있는 비옥한 흙이 건강한 뿌리를 키우지만, 식물의 뿌리가 있기 때문에 흙이 비옥해지는 효과도 있다. 무성하게 자란 풀뿌리들은 빗물이나 바람에 쓸려나가지 않게 흙을 붙들어주고, 주변의 공간에 수분을 머금어 토양의 함수성을 높인다. 뿌리의 분비물은 작은 생물들을 모여들게 하고, 죽은 뿌리들은 유기물로 제공되어 좋은 흙을 만든다. 매년 새로 자라나고, 일정 부분 죽어 없어지는 풀과 그 뿌리 덕분에 큰 나무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진다.
뿌리와 흙은 서로 얽혀 있는 공존의 생태계이다. 쓰임새를 알지 못해 잡초로 불리는 풀들의 명멸 덕분에 토양이 비옥해진다. 그 토대에서 좋은 나무가 자란다. 요즘 우리의 바이오기업들이 혁신 신약을 만들고 조 단위의 기술 수출에도 연달아 성공한 사례들이 이어지고 있어 기대가 크다. 그러나 이들을 배출한 풀뿌리 벤처 생태계가 말라가는 것에 대한 염려도 크다. 노벨상이든 아카데미상이든 세계 최고로 인정되는 미래의 스타들이 나오려면 어느 분야든지 풀뿌리 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집중 선택된 소수에게만 비료를 몰아주는 전략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지속가능한 미래의 과실을 원한다면, 올 한해 풀뿌리 토양의 생태계를 어떻게 가꾸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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