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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오는 메시지를 귀 기울여 듣는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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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시평] 김희한 수필가

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좁게 열린 틈새로 잠시 멈췄다가 다시 스며드는 기척. 낙엽이 지는 소리인지, 마음이 흔들리는 소리인지 모를 떨림이 가을 아침의 정적을 깨운다.

창밖의 나무들은 말없이 가지를 비워가고 있다. 한 계절을 온전히 살아낸 흔적들이 제 발밑으로 흩어진다. 자연은 매 순간 존재하면서도 한 번도 서두르지 않는다. 바람이 불고, 잎이 떨어지는 모든 움직임은 필연이자 수용이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흐르고 변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흐름은 때때로 멈춤을 품고 있다. 흐름만으로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 멈춤은 흐름을 자각하게 해 준다.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나도 그 멈춤 앞에 있다. 수용이다.

문득, 바람이 지금 내게 건네고 있는 말을 생각한다. 오늘 걷는 걸음은 무엇을 얻기 위함인지, 방향은 맞는지, 시간은 이상과 목적 사이에서 쉼 없이 굴러가는데 그 속도를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할 때도 있고 어느 때는 예상하지 못한 멈춤이 찾아오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은 계절이 내게 건네는 언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언젠가부터 나는 멈추는 연습을 하고 있다. 하루를 계획하지 않고 시작하거나, 그냥 걷는 길에서 방향을 바꾸어 보기도 한다. 이유 없이 창밖을 오래 바라보거나, 낯선 골목에서 무심코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또는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런 시간들은 표면적으로는 아무 의미 없어 보이지만, 실은 내 안의 숨겨진 목소리가 고개를 드는 순간들이다. 목적지 없이 걷는 길에서 오히려 더 뚜렷하게 나의 현재가 보인다. 그렇게 나를 조용히 두면, 어느새 내 안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괜찮아. 지금 이대로 충분해."

그건 누군가가 해준 위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보낸, 작고 단단한 메시지다. 세상은 늘 더 나아지라고, 나아가고 더 이루라고 말하지만, 그 순간 내 안에서 조용히 피어난 그 말은 성장이 아닌 수용의 언어였다. 그것은 '되어야 할 나'를 향한 다짐이 아니라, '지금 있는 나'를 인정하는 선언이었다.


하이데거는 '존재는 드러나는 것'이라 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는 외부의 판단이 아니라, 멈추어 고요히 귀 기울일 때 비로소 드러난다. 가을은 그런 계절이다. 바빠서 놓쳤던 것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고, 잊었던 감정들이 낙엽처럼 천천히 내려앉는다. 그 감정들은 한동안 미뤄두었던 마음의 상자 속에서 기척도 없이 꺼내진다.

거기에는 후회도 있고, 감사도 있고, 조금은 미련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모든 감정이 나를 이루는 재료였고, 나를 나답게 만든 흔적들이었다는 걸. 내게 온 모든 것들은 와야 해서 온 것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런 감정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귀 기울이면 또 계절이 걸음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너는 어디에 서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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