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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묘한 사기, 형식적 민주주의… 기후부 '핵발전소 여론조사'

프레시안 강언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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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언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이사]
정부의 신규 핵발전소 추진에 반대하며 탈핵 순례길에 오른 이들이 16일간 856킬로미터를 걸어 지난 20일 청와대 앞에 도착했다. 이번 탈핵 순례는 고리와 영광, 세종에서 각각 출발해 서울로 향했다. 거대한 핵발전소와 송전탑을 마주하며 각지에서 출발한 탈핵의 걸음이 전기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도시 서울로 향했다.

이 길 위에는 핵발전소 인근에서 살아온 주민과 활동가들뿐 아니라, 석탄발전소와 송전탑, 신공항과 4대강 난개발의 현장에서 싸워 온 이들이 함께했다.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안다는 말처럼, 국책사업과 경제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파괴돼 온 생명과 공동체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순례에 함께하며 서로의 마음을 이었다.

탈핵사회를 위한 순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한국 사회의 핵발전 문제를 드러내고 탈핵과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이야기하기 위해 수차례 순례가 이어져 왔다. 생명·평화·탈핵 순례라는 이름으로 종교인들은 수년간 걸었고, 노후 핵발전소 폐쇄를 위해 경주와 부산 등에서도 지역 탈핵순례가 이어졌다. 일본 시민사회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함께 걸으며 한·일 연대를 다지기도 했다.

그동안 탈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왔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이 걸음은 단지 핵발전의 문제를 알리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위험을 특정 지역과 사람들에게 떠넘겨 온 에너지 체제를 바꾸기 위한 간절한 바람이었다.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15년 동안 탈핵시민사회는 농성하고, 순례하고, 집회를 이어 오며 탈핵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행동했다.

▲2026년1월 20일 탈핵희망 전국 순례단 청와대 앞 기자회견 ⓒ탈핵순례단

▲2026년1월 20일 탈핵희망 전국 순례단 청와대 앞 기자회견 ⓒ탈핵순례단



숫자로 묻지 못하는 것들

그러나 정부의 방식은 너무나 간단했다. 이재명 정부는 윤석열 정부에서 수립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포함된 신규 핵발전소 건설 문제를 두고 처음에는 공론화를 하겠다고 하더니, 곧 여론조사로 판단하겠다며 방향을 바꿨다.


21일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포함된 신규 원전 계획에 관한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한국갤럽(전화조사, 1,519명)과 리얼미터(ARS 조사, 1,505명)를 통해 진행됐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제11차 전기본에 포함된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이 추진돼야 한다'는 응답은 69.6%로, '중단돼야 한다'는 응답(22.5%)보다 세 배 이상 높게 나타났다. 원자력 발전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필요하다'는 응답이 89.5%에 달했고, 안전성에 대해서는 '안전하다'는 응답이 60.1%로 집계됐다.

리얼미터 조사에서도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규 원전 추진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61.9%로, 중단 의견(30.8%)보다 두 배가량 높았고, 원자력 발전이 필요하다는 응답 역시 82.0%였다. 안전성에 대한 응답은 60.5%가 안전하다고 답변했다. 향후 확대가 필요한 발전원에 대한 질문의 결과 한국갤럽은 △재생에너지 48.9% △원자력 38.0% △액화천연가스(LNG) 5.6% 순으로 조사됐고 리얼미터 조사에서도 △재생에너지 43.1% △원자력 41.9% △LNG 6.7% 순이었다. 이번 조사 결과와 관련해 기후부는 "(최근) 두 차례에 걸친 정책토론회 결과와 이번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해 신규원전 추진 방안 등에 대해 조만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수치들은 언뜻 보기에 '국민 다수가 신규 원전을 원한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번 여론조사에는 근본적인 문제들이 존재한다.

첫째, 신규 핵발전소 건설 여부를 여론조사로 묻는 것 자체가 문제다. 에너지 정책은 인기투표가 아니라 충분한 정보 제공과 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검토를 통해 결정돼야 할 사안이다. 에너지 정책 전반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신규 원전 추진 여부'만을 콕 집어 묻는 방식은 정부가 정책 결정의 책임을 여론 뒤로 숨겠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더 이상 신규핵발전소 건설은 없을 것이라고 하더니 신고리 5·6호기(현 새울3·4호기) 건설 여부에 대해 공론화를 진행하면서 정부의 책임은 공론화 과정 뒤에 숨었다. 당시 공론화는 당사자 참여의 부재와 정보의 불균형 등 여러 한계를 안은 채 '핵발전소는 단계적으로 줄여가되 신고리5·6호기는 건설한다'라는 결론이 났다. 공론화보다도 못한 여론조사와 제한적인 토론으로 핵발전소 건설과 같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겠다는 발상은, 핵발전이라는 문제의 무게를 지나치게 가볍게 다루는 것이다.


둘째, 이번 여론조사는 시작부터 특정한 방향을 전제하고 있다. 조사 문항 서두에서 "재생에너지의 불안정성을 보완하고 AI·반도체·전기차 등 증가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도 활용하는 에너지 믹스를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함으로써, 원자력은 이미 '불가피한 선택지'로 제시된다. 전기본 계획이 수립될 때마다 그동안 시민사회가 끊임없이 제기해 온 '전력수요의 증가'(수요관리는 없이 과도한 증가 예측만을 전제로, 심지어는 예측의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를 기정사실화하고 사고 발생 시 회복 불가능한 피해, 고준위 핵폐기물 문제 등 핵발전이 지닌 위험은 이 설명에서 빠져 있다.

셋째, 문항 구성 역시 선택지를 제한한다. '향후 확대가 필요한 발전원'을 묻지만 각 발전원이 사회에 남기는 비용과 위험은 비교 대상에서 제외된다. 원자력 안전성을 묻는 질문에서도 노후 핵발전소의 구조적 위험이나 사고 발생 시 지역사회가 감당해야 할 피해는 질문 바깥에 있다. 신규 원전 건설 여부는 '추진'과 '중단'이라는 선택지만 제시될 뿐, 왜 그리고 누구의 삶 위에 그 결정이 놓이는지는 묻지 않는다.

정보가 제한된 상태에서 특정 전제를 깔고 진행된 질문은 응답자의 판단을 구조적으로 한 방향으로 이끈다. 이는 의견수렴의 방식이 아니라, 수치로 포장된 정책 정당화일 뿐이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포함된 신규 원전 계획에 대한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 ⓒ기후에너지부 보도자료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포함된 신규 원전 계획에 대한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 ⓒ기후에너지부 보도자료



잘못된 정책은 폐기하고 안전과 정의를 기준으로 재수립돼야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된 같은 날, 이재명 대통령은 신년기자회견에서 "원전 문제가 너무 정치 의제화됐다"고 말하며 "기저 전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차원에서 이념적으로 닫혀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밝혔다. 또 "최근 국제 추세나 에너지의 미래를 고민해 보면, 엄청난 에너지 수요가 있는 게 사실이고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도 있다"며 " (신규 원전이) 필요한지, 안전한지 , 또 국민 뜻은 어떤지 등을 열어놓고 판단하자 "고 말했다.

또 지난 정부가 세운 원전 건설 계획과 관련해서도 "국가 정책의 안정성과 지속성 측면에서도 무언가를 결정했는데 정권이 바뀐다고 마구 뒤집으면 예측 가능성이 떨어져 경영 주체의 미래 경영 판단에 장애를 주는 측면이 있다"며 "국제적으로 원전 수출이 중요한 과제이고, 원전 시장이 (늘어나고) 있는 점도 고려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최종 결정이 남았으니 공론화와 의견 수렴을 열어놓고 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여론조사 자체가 공론화일 수는 없다. '정책의 안정성과 지속성'이 국민의 안전과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의 방향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 윤석열 정부가 수립한 제11차 전기본은 이미 여러 문제를 안고 있으며,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계획이다. '경영 주체의 미래경영 판단에 장애를 주는 측면'이 있다면 '핵발전소 지역의 안전, 나아가 미래세대가 짊어질 더 많은 핵폐기물의 위험을 전가하는 측면' 역시 고려해야 한다.

사회의 책임을 묻고 우리의 책임을 나누는 것

탈핵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사람들은 걷고, 또 법적 대응이라는 방식으로 핵발전의 문제를 이어서 묻고 있다.

2025년 2월 국회를 통과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고준위 특별법)'을 둘러싸고 현재 헌법소원이 진행 중이다. 고준위 특별법은 사용후핵연료를 핵발전소 부지 안에 장기간 임시 저장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충분한 논의와 사회적 숙의 없이 이른바 '졸속 입법'으로 통과됐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핵발전소 인근 지역 주민들과 탈핵단체들은 이 법이 주민들의 행복추구권과 환경권, 평등권 등을 침해한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부산과 경주 등에서 284명이 청구인으로 참여했고, 피청구인으로는 국회와 대한민국 대통령이 명시됐다. 고준위 핵폐기물의 책임을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떠넘길 것인지를 시민들은 이제 헌법소원이라는 방식으로 다시 묻고 있다.

노후 핵발전소 문제 역시 다르지 않다. 지난해 11월,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설계수명을 다해 멈춰 있던 고리2호기의 수명연장을 승인했다. 단 세 차례, 총 여섯 시간에 불과한 회의 끝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필수적으로 강화돼야 할 사고관리계획과 중대사고 대응 체계는 부실하게 심의됐고, 노후 핵발전소의 수명연장에 적용돼야 할 최신 안전 기준과 기술 기준 역시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 충분한 안전성 검증 없이 내려진 이 결정에 대해 현재 '고리2호기 수명연장 허가 무효 시민소송'을 제기하기 위한 시민소송단 모집이 진행 중이다.

탈핵순례길에 함께하지 못한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핵발전소 건설과 수명연장의 문제는 몇 개의 문항과 수치로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핵발전소와 송전탑 인근에서 살아온 주민들의 희생과 고통은 우리가 전기를 편리하게 사용하는 동안 오랫동안 외면돼 왔다. 고준위 핵폐기물의 문제 역시 특정 지역이나 미래의 누군가에게 떠넘길 수 없는, 지금을 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진행 중인 고리2호기 수명연장 허가 무효소송에 함께하는 일은, 핵발전의 위험을 더 이상 특정 지역과 사람들에게만 전가하지 않고 그 책임을 함께 나누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고리2호기 수명연장 허가 무효 시민소송>
- 내용: 40년 설계수명이 만료된 고리2호기 계속운전(수명연장) 허가의 위법성을 묻는 시민소송
- 취지: 충분한 안전성 검증 없이 내려진 수명연장 결정에 대한 법적 판단 요청
- 원고 자격: 국내에 거주하는 시민 누구나 참여 가능
- 모집 마감: 2026년 1월 31일
- 참여 방법: https://tally.so/r/xXjoy5(링크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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