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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덮인 ‘광장’을 그리는 이유[정덕현의 끄덕끄덕]

이데일리 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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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이 그린 이명준이 떠난 뒤 60여 년
북녘 땅 외로움의 광장에 선 보리와 복주
밀실 없는 북녘의 광장, 갈라진 남녘의 광장
진정 자유로운 경계 없는 '광장'은 어디에
[정덕현 문화평론가] ‘광장’만큼 이념 대립의 화두가 돼온 은유가 있을까. 1960년 최인훈이 발표한 소설 ‘광장’은 일찍이 이 화두를 던진 작품이다. 소설 속 이명준은 밀실은 넘치지만 광장이 없는 남한과 광장은 있으나 밀실이 없는 북한 사이에서 고통받다 끝내 푸른 바다로 뛰어드는 것으로 파국을 맞는다. 그 소설이 나온 후 66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이 광장의 은유는 여전한 것 같다. 이념으로 분단된 남북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북한은 여전히 개인의 자유가 제한된 밀실 없는 세상이며 남한 역시 광장이 있긴 하지만 이곳 역시 이념 대립의 공간이 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개봉한 김보솔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광장’은 그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한 세계의 쓸쓸함이 담겨 있다. 6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마치 과거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시간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듯한 쓸쓸함이.

제목에서 느껴지듯 이 애니메이션은 저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영감을 받았다. 애니메이션 속 북한 통역관 리명준이라는 이름을 소설 속 주인공 이명준에서 따왔을 정도다. 실제 평양에서 근무한 스웨덴 외교관의 인터뷰에서 모티브를 딴 이 작품은 평양 주재 스웨덴 서기관인 보리와 교차로에서 일하는 교통보안원 서복주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하지만 이들 사이를 가로막는 북한 사회의 통제와 감시는 이 사랑 이야기를 자유에 대한 서사로 확장시킨다. 보리와 복주는 길거리에서 손을 잡는 것도 심지어 함께 걸어 다니는 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늘 감시하는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푸른 눈에 금발의 외부인인 보리와의 내밀한 접촉은 그 자체가 스파이짓으로 오인된다. 이건 보리의 통역관인 리명준도 마찬가지다. 함께 삶은 계란에 맥주 한잔하자는 보리의 작은 호의조차 리명준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 행위는 누군가에게 보고돼 자칫 ‘평양 추방’이라는 조치까지 취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보리와 복주의 사랑이 허락될 리 없다. 그저 조금 떨어져 함께 걷거나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밀어를 나눠도 감시의 시선은 늘 따라붙는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더 절절해진다.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의 동토라 그들이 내뿜는 입김과 온기는 더 간절해진다. 조금만 더 평양에 머무르겠다는 간청이 거절되고 갑자기 복주마저 사라져 버리자 꾹꾹 억눌렀던 보리의 감정은 결국 폭발한다. 보리는 복주를 찾아 평양 거리를 헤매지만 찾을 수 없게 되자 리명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리명준은 보리의 그런 행동을 “이기적인 새끼”라며 비난한다. 그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서복주에게는 처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입은 ‘광장’의 주인공은 그 남녀인 보리와 복주지만 이념의 억압과 자유를 담은 사회극으로 확장한 이 작품에서 또한 주목되는 인물은 리명준이다. 그는 보리의 호의 앞에서도 저 꽁꽁 얼어붙은 동토처럼 차갑기만 한 인물로 등장하지만 그들의 사랑을 감시하고 바라보면서 조금씩 변화해 간다.

김보솔 감독은 리명준의 변화를 통해 저 견고해 보이는 감시 체제에도 작은 균열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담았다. 처절하게 복주를 찾아다니다 술에 취해 길에 널브러진 그를 일으켜 세우고 자전거로 집까지 태워다 주는 인물은 바로 리명준이다.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계란은 보리에 대한 리명준의 마음이 변화해 가는 것을 보여주는 메타포(은유)로 쓰인다. 보리가 호의로 건넸지만 리명준이 뿌리쳐 깨진 삶은 달걀과 감시하는 것을 알아차린 보리가 술에 취해 던져 리명준이 있던 창문을 깨버린 달걀 그리고 그것이 삶은 달걀인 줄 알고 이마로 깼다가 터져버린 날달걀이 그것이다. 그렇게 보리가 건네는 달걀들은 조금씩 리명준의 마음에 균열을 내고 결국 그는 선을 넘는다. 자신이 추방되는 것을 무릅쓰고 보리가 복주를 만나는 것을 돕는다. 보리를 감시하는 일을 하던 그는 왜 갑자기 이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을까. 리명준은 말한다. “글쎄요…. 외로웠나 봅니다.”

외로움. 그것은 인간적인 감정이다. 리명준이 그것을 느꼈다는 것은 이전까지 그가 어떤 세계 속에서 살아왔는가를 에둘러 말해준다. 그것은 말 한마디 잘못하거나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조차 ‘추방’ 같은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세계다. 그 불안은 외로움마저 잠식한다. 외로움을 느낄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리명준이 외로웠나 보다고 말하는 것은 이 단단하게 얼어붙은 세계 속에 난 작은 균열이자 희망이다.

이 애니메이션에는 북한의 광장이 등장하는데 그 광장 바닥에 마치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지정하는 듯한 숫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쓰인 게 인상적이다. 그건 광장이 있어도 자유는 없고 통제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광장은 어떨까. 자유롭게 모여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마음껏 내놓을 수 있는 광장인가. 물론 그렇다. 1987년 6.10 민주화 운동의 광장이 그랬고 2002년 월드컵 축제의 광장이 그랬으며 2016년 촛불 시위의 광장이나 갑작스러운 계엄 선포에 벌어진 응원봉 시위의 광장이 그랬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첨예해진 정치 이념 갈등 속에서 우리의 광장도 결코 넘나들 수 없는 경계와 선을 그려 놓은 게 사실이다. 때로는 심지어 심각한 폭력과 유혈 사태가 벌어질 정도로 그 경계는 단단해졌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눈 내리는 광장 위로 리명준이 자전거를 타는 마지막 장면이다. 눈이 덮여 아무런 경계도 없는 그 위로 자전거가 만들어내는 궤적은 자유롭기 그지없다. 그것은 아마 리명준의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투영된 궤적일 것이다. 극장을 나서며 우리의 광장을 떠올렸다. 이념으로 나뉘어 결코 넘어설 수 없게 된 그 단단한 경계 위로 포용과 존중의 눈은 과연 언제쯤 내릴 것인가. 그 위로 자유로이 넘나드는 궤적을 그릴 날이 오기는 올까. 괜스레 쓸쓸해졌다.

김보솔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광장’ 포스터.(사진=스튜디오디에이치엘)

김보솔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광장’ 포스터.(사진=스튜디오디에이치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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