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서울 집앞에서 큰딸을 안고 있는 새댁 박완서. |
1970년 40세 가정주부가 소설가로 데뷔했다. 이름은 박완서(1931~2011). ‘여성동아’ 장편 공모에 소설 ‘나목’이 당선작으로 뽑혔다. 아이 다섯 둔 이 전업주부는 이후 40년간 끊임없이 글 쓰며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우뚝 섰다.
별세 5개월 전에도 창작 의욕을 드러냈다.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내고 가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향후 어떤 소설을 쓸 것인가 묻자 답했다.
2010년 8월 2일자 A19면. |
“아직은 계획 없어요. 몇 년 후 계획을 세우고 살기엔 내가 늙었거든요. 하지만 쓰고 싶은 이야기는 물론 있어요. 나이가 들면서 예전처럼 빨리 쓰지는 않지만 좋은 문장을 남기고 싶고, 지금도 머릿속으론 작품 생각을 계속 해요.”(2010년 8월 2일 자 A19면)
2010년은 등단 40주년이었다. 이해 2월 단편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를 냈다. ‘자전 소설’이란 부제를 달았다.
“작가에게 처음으로 자의식을 갖게 한 시골집의 아버지 사진, 고향인 경기도 개풍에서 서울로 올라와 처음 터를 잡았던 인왕산 밑 산동네의 기억, 글을 쓰게 된 계기, 그녀의 삶에서 가장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 아들과의 영원한 이별, 그 모든 사건을 겪은 뒤 새로운 소명으로 다시 받아들인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자각 등을 엿볼 수 있다.”(2010년 2월 1일 자 A21면)
1977년 11월 19일자 5면 |
서울 올림픽 개최로 세상이 들떴던 1988년은 악몽의 해였다. 이해 5월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석 달 후 외아들이 사고로 사망했다. 1994년 낸 창작집 ‘한 말씀만 하소서’는 아들 잃고 고통 속에서 쓴 일기와 어머니들의 아픔을 그린 단편을 묶었다. 박완서는 글을 쓰면서 참척의 슬픔을 이겨냈다. 후배 소설가 공지영이 박완서를 만나 인터뷰하고 글을 썼다.
“‘한말씀만 하소서’는 작가 자신이 밝힌 대로 실제로 이렇듯 죽음이라는 경계선 저편으로 아들을 보내고 쓴 내밀한 상처와 고통의 기록이다. (중략) 이별한 아들의 생명과는 감히 비길 수 없었겠지만 모국어를 떠나서도 그녀는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런 경험을 단편소설로 만들어서 발표한 것이 바로 요즘 연극으로도 공연돼 화제를 낳고 있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다. 그녀는 그 모국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아픔을 ‘모국’의 아픔으로 승화시켜낸다. 그리하여 아직도 독한 세월을 살아내고 있는 이땅의 뭇 어머니들을 위무하는 것이다.”(1994년 5월 5일 자 15면)
1994년 5월 5일자 15면. |
박완서는 신문 칼럼과 인터뷰 등을 통해서도 우리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2001년 소설가 이문열 작품을 불태운 ‘책 장례식’을 비판했다. 박완서는 “이문열씨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를 떠나서 그는 일단 존중받아야 할 작가라고 생각한다”면서 “수많은 문학 단체의 침묵은 또 뭡니까? 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떠한 발언도 없이 그냥 넘기는 건 문학하는 사람들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2001년 11월 19일 자 19면)라고 했다.
2004년 인터뷰에선 “옛날에는 빨갱이로 몰릴까 봐 치사해도 말 못하고 살았는데, 요즘은 보수로 몰릴까 봐 말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라며 “전에는 내가 과격한 진보였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나이와 함께 보수로 가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옳다고 믿는 것을 조금씩 수정하며 지켜가는 게 왜 나쁩니까?”라고 했다.
2004년 2월 18일자 A5면. |
좌·우나 진보·보수가 아니라 수준이 문제였다. 다른 의견을 비판할 때도 ‘악취’가 아니라 ‘향기’가 있어야 한다.
“일부 신문 칼럼 중에는 악취가 풍기는 글이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들 자신만만한지. 글에는 문향(文香)이 있어야지요. 지금은 온건한 다수들이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내야지요. 그러나 겁나는 일이에요.”(2003년 3월 8일 자 A21면)
2004년 4월 13일자 C7면. |
박완서는 조선일보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조선일보 기사 검색에서 ‘박완서’를 넣으면 인터뷰를 비롯한 관련 기사가 938건 나온다. 1994년 단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조선일보 주관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1996년부터 2006년까지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을 맡았다.
2003년 3월 8일자 A21면. |
칼럼과 서평 등 글도 다수 썼다. 2008년 1년간 ‘Books’ 지면에 ‘박완서의 친절한 책 읽기’를 연재했다. 조선일보 지면에 가장 먼저 쓴 글은 유서 깊은 코너 ‘일사일언’이었다. 1974년 9월 24일 자로 쓴 ‘일사일언’의 제목은 ‘양극단’이다. 지금도 울림이 있다.
“무엇보다도 국민총화가 시급하다고 나라 걱정하시는 높은 분들은 말씀하신다.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누가 누구하고 어떻게 화(和)하란 말씀인가. 썩은 생선 내장을 뒤지는 손하고 열손가락마다 보석이 번쩍이는 손하고 어떻게 마주잡나. 우선 도저히 마주 잡을 수 없는 이 양극단을 없애는 일부터가 시급하다 하겠다.”(1974년 9월 20일자 5면)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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