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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이름 꺼내자, 주민들 눈빛이 달라졌다

조선일보 누크(그린란드)=원선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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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땅’ 그린란드 원선우 특파원 르포]
“싸이코 트럼프는 광물만 탐내”
거리 곳곳 ‘자치령 깃발’ 휘날려
정부는 “5일치 식량 비축 해달라”
그린란드 시민들이 20일 누크 공항에서  유럽 국가들과의 회동을 마치고 돌아온 비비안 모츠펠트 그린란드 외무연구부 장관의 발언을 듣고 있다./EPA 연합뉴스

그린란드 시민들이 20일 누크 공항에서 유럽 국가들과의 회동을 마치고 돌아온 비비안 모츠펠트 그린란드 외무연구부 장관의 발언을 듣고 있다./EPA 연합뉴스


20일(현지시각) 오후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 수도 누크의 기온은 영하 15도까지 떨어졌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거리는 인도·차도를 구분할수 없을만큼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하지만 모자·장갑으로 중무장하고 잔뜩 웅크린 채 걸음을 옮기던 주민들도 ‘도널드 트럼프’ 이름을 듣는 순간 눈빛이 달라지며 열을 뿜었다. “미치광이(mad)” “제정신이 아냐(insane)” “싸이코(psycho)” 같은 표현이 쉼 없이 나왔다. “우리는 미국의 일부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We don’t want to be a part of America)”고 말할 때 이들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기도 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스위스 다보스 포럼 참석을 앞두고 소셜미디어에 올린 ‘그린란드는 미국의 영토’ 합성 사진 등이 이들을 더 끓어오르게 만든 듯했다. 그린란드 자치정부는 이날 “미국과의 군사 충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주민들에게 5일치 비상식량 비축을 권고하는 등 ‘민방위 태세’를 강화했다.

지난 17일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 주민들이 그린란드 국기와 ‘그린란드는 판매용이 아니다’라는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수도 누크에 있는 미국 영사관 앞에 모여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그린란드를 미국으로 편입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드러내자 이에 반발한 그린란드 주민들의 집회가 잇따르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지난 17일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 주민들이 그린란드 국기와 ‘그린란드는 판매용이 아니다’라는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수도 누크에 있는 미국 영사관 앞에 모여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그린란드를 미국으로 편입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드러내자 이에 반발한 그린란드 주민들의 집회가 잇따르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누크 거리 곳곳에는 흰색과 빨간색 가로 줄무늬 바탕에 각각 색이 반대인 반원이 그려진 그린란드 자치령 깃발이 휘날렸다. 빨간색은 바다와 태양, 흰색은 만년설과 빙산을 상징한다. 덴마크 국기 색을 쓰면서도 십자가 대신 반원을 사용한 이유는 이누이트 원주민의 독립성을 상징한다고 거리를 지나던 한 시민은 말했다.

본지가 그린란드에서 만난 주민들은 처음엔 외부 세계의 ‘벼락 관심’이 부담스럽다는 눈치였지만, 이내 속내를 털어놨다. 관공서에서 근무하는 이누이트계 말리크(27)는 “트럼프는 이 땅의 광물만 탐할 뿐, 우리가 자기네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엔 전혀 관심이 없다”고 했다. 말리크는 “우리도 언어, 역사, 문화를 가지고 있고 미국의 존중을 받을 권리가 있다”며 “트럼프가 우리를 대하는 방식은 모욕 그 자체”라고 했다. 그는 미국이 군사 행동에 나설 가능성에 대해 “그럴 거라고 전혀 믿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도 붕괴될 수밖에 없다. 미국을 제외한 동맹국들이 우릴 지켜주려면 미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는 트럼프를 여러 번 ‘그 싸이코’라고 표현했다.

그래픽=백형선

그래픽=백형선


◇“트럼프가 베네수엘라도 진짜 때렸는데… 우리만 예외일 수 있겠나"

‘그린란드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나라인 미국에 편입되는 게 나쁘지 않다’는 의견도 외부에서 일부 있다고 하자 말리크는 잠시 기자를 노려보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기서 잘 살아오고 있었다. 왜 우리가 미국의 일부가 돼야 하는지 말해달라”고 했다. 그의 눈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곁에 있는 70대 여성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환하게 웃으며 “굿(Good)”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는데, 말리크가 그린란드어로 통역해주자 표정이 돌변했다. “우리가 미국인이 되고 싶다고 답할 그린란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내 은행에서 업무를 보던 클라라(30)도 “최근 트럼프가 하는 짓을 보면 우리도 결코 안전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최근 미국의 이란·베네수엘라 공습을 언급하며 “트럼프는 정말로 그 나라들을 공격했고 이제 쿠바까지 친다는 얘기가 있는데, 우리만 예외일 수가 있겠냐”며 “유럽과 나토가 우리를 안심시키려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상황이 워낙 어렵다 보니 마음이 놓이지가 않는다”고 했다.

이날 누크 공항에는 그린란드 깃발을 든 수백 명 인파가 몰렸다. 한국의 중소 도시 버스터미널 크기의 이 공항이 미어터질 것 같았다. 최근 미 백악관에서 미국·덴마크 정부와 회담을 하고 나토 회의에 참석한 뒤 돌아오는 비비안 모츠펠트 자치정부 외무장관 환영 인파였다. 어린아이부터 70~80대 노인까지 나와 모츠펠트의 연설을 들었다. 한 젊은 엄마가 안고 나온 아기의 손에도 그린란드 깃발이 들려 있었다. 모츠펠트는 “우리나라(그린란드)가 다시 예전처럼 안전한 곳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여러분이 익숙하고 안전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지난 17일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 주민들이 그린란드 국기와 ‘그린란드는 판매용이 아니다’라는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수도 누크에 있는 미국 영사관 앞에 모여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 17일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 주민들이 그린란드 국기와 ‘그린란드는 판매용이 아니다’라는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수도 누크에 있는 미국 영사관 앞에 모여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AP 연합뉴스


카렌 옌센(75)도 그린란드 깃발을 들고 취재진에 둘러싸인 모츠펠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1970년대 덴마크에서 남편과 그린란드로 이주해 50년 넘게 이곳에서 살아오고 있다고 했다. 그는 트럼프를 향해 “2년 전부터 맛이 간 것 같더니 이젠 정말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지난주 누크에서 열린 대규모 트럼프 규탄 집회에도 참석했다면서, “앞으로 미국이 정신 차릴 때까지 계속 이 깃발을 흔들며 시위에 나갈 것”이라고 했다.

옌스-프레데리크 닐센 그린란드 자치정부 수반은 이날 누크 정부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과의 군사 충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며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자치정부는 유사시를 대비한 대응팀을 설치하고, 주민들에게 닷새분 비상식량 비축을 권고했다. 일부 주민들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생필품 사재기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그린란드 정부는 주민들에게 상황별 생존·대피 방안을 안내하는 ‘민방위 대책’도 수립 중이라고 밝혔다.

인구 5만6000여명이 사는 그린란드는 최근 역사상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그린란드 시내 주요 길목마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든 전세계 취재진이 실시간 보도를 하고 있다. 지난 17일 대규모 반미 집회가 열린 누크 시내의 미국 영사관 주변에도 각국 기자들이 몰려와 촬영을 하고 있었다. 당시 2만 명 누크 주민 중 5000명이 이곳에 모여 “양키 고홈” “우리는 파는 물건이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미국 문장이 새겨진 원형 간판 위로 얼어붙은 채 흔들리는 고드름은 붕괴 위기에 처한 대서양 동맹의 위태로운 상황을 보여주는 듯했다. 미국 영사관과 불과 100m 거리인 덴마크군 북극사령부 건물에선 수시로 심각한 표정의 전투복 차림 군인들이 나와 차량을 타고 어디론가 급하게 이동했다. 미국 영사관 앞을 지나던 한 주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주민은 “트럼프 때문에 우리의 일상은 이제 더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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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크(그린란드)=원선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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