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전의 군대는 왕의 소유였다. 전쟁은 군주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됐고, 병사는 주로 용병이거나 직업군인이었다. 평민은 세금과 노역을 부담했을 뿐이다. ‘국가를 위해 싸운다’는 개념조차 없었다. 이런 질서를 뒤집은 사건이 18세기 말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이다. 1793년 8월 혁명정부는 혁명 저지를 위한 유럽 연합과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조국이 위험에 처하면 모든 프랑스인은 조국 방위의 의무가 있다”라고 선언했다. 하루아침에 70만명의 대군이 만들어졌다. 이른바 ‘국민개병제’의 시발점이다.
초기 징병제의 핵심은 왕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자유와 국가를 위한 의무로 각인됐다. 누구나 복무하며, 시민으로 구성됐다. 흔히 폭압과 강제의 언어로 불리는 ‘징병’이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와 시민권의 출발이었던 셈이다. 물론 당시도 대체복무, 면제, 계층적 차별은 존재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원칙의 대전환이었다. 프랑스 국민군은 동원 규모와 사기, 속도 면에서 용병을 동원한 연합 군대를 압도했다. 혁명전쟁 이후 징병제는 19세기 유럽 전반으로 확산했다.
20세기 들어 제국주의 경쟁으로 전쟁이 가속하자 징병제는 시민의 권리에서 국가의 강제 의무로 성격이 변모했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수많은 10~20대 청년들이 대량 희생되자 세대 갈등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전후 유럽 사회에 퍼진 인식은 “노인의 전쟁, 그리고 청년의 죽음”으로 귀결됐다. 전후 세대에게 “국가는 어디까지 시민의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이는 유럽 다수 국가에서 징병제 폐지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2011년 징병제를 폐지했던 독일이 올해 징병제 부활에 나섰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해 재무장을 추진하면서다. 새 제도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자 베를린 등 독일 내 여러 도시에서 수만 명의 10대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반대 시위를 벌였다.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암울한 취업 전망과 높은 생활비에 직면한 청년들이 군 복무를 “기성세대를 위해 희생하라”는 요구로 인식,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고 짚었다. 출산율 저하와 세대 간 갈등이 심화하는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는 미래다.
박병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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