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내일 프로젝트’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30명의 청년 배우들과 만난 배우 박근형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헤럴드경제 고승희 기자] “그 사람 맞아? 근데 아주 더럽게 못하더라고. 가운데 ‘아주 더럽게 못하더라고’를 넣고, 흉내를 냈어요. 대사 가운데 동작이 있어요. 대본을 150번씩 읽으면 대사는 절로 외워지고, 모든 게 다 보여요. 그걸 항상 놓치면 안돼요.…(중략)”
연극 ‘더 드레서’ 속 대사가 갑작스레 침입하자, 강의실은 이내 무대가 됐다. 순식간에 눈빛과 표정을 바꾸는 배우를 향해 경외의 눈빛이 시종 반짝였다. 세월의 길이만큼 늘어난 짙은 주름 사이로 인자한 미소가 묻어났다. 노장 배우는 “무대로 돌아온 비슷한 연령대의 노배우 중 원래는 셋째였는데 얼마 전 큰 형님(고(故) 이순재)이 떠나 둘째가 됐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제 내가 가면 누가 할 사람도 없으니 조금 지루하더라도 귀담아들어 주길 바란다”며 웃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인재개발원. 최근 이곳에선 무려 30대1 이상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 티켓’을 받아 든 청년 배우 30명의 2박 3일 워크숍이 진행됐다. 둘째 날 마련된 자리는 배우 박근형(86)의 마스터클래스. 그는 새싹 배우들보다 더 반짝이는 눈빛으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19살에 연극계에 투신해 스승도 없이 7년간 일하면서 배운 것들, 이후 다시 학교에 다니고 지금까지 활동하며 익힌 모든 것을 종합한 것“이라고 했다.
대배우가 잠깐 들러 덕담이나 건네는 자리가 아니었다. 박근형은 여러 장의 A4 용지에 이제 막 피어보려는 어린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을 꾹꾹 눌러 담아왔다. ‘연극의 기본’을 다시 세우려는 진심의 호소이자, 길 잃은 청춘을 향한 따뜻한 위로였다.
이날 마스터클래스에 참석한 배우 황수경은 “말씀하시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필기를 열심히 했다”며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정말로 새싹일 뿐인 저희를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진심으로 잘되길 바라는 마음을 전해주셔서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오늘의 자리가 굉장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했다.
‘연극내일 프로젝트’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30명의 청년 배우들과 만난 배우 박근형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색칠공부 멈추고 ‘내 생각’ 꺼내라
“요즘 배우들은 색연필로 줄만 긋고 고민은 안 해요. 미술, 음악, 건축은 앞서가는데 연극, 배우 예술만 제자리걸음입니다. 여러분이 분발하지 않으면 연극계는 붕괴합니다.”
대배우의 진단은 매서웠다. 연출가가 동선을 그어주지 않으면 꼼짝도 못하는 배우, 대본을 화려하게 꾸밀 뿐 정작 대사의 이유는 고민하지 않는 배우…. 박근형은 ”요즘엔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형의 배우, 입체적 분석 없이 어제 했던 연기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배우가 넘쳐난다”고 꼬집었다.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나만의 생각’이다.
“배우는 선남선녀가 아니라 자유로운 예술가예요. 자기 생각을 펼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감추지 말아야 하죠. 자기 생각을 감추는 순간 탈락! 모든 연기는 내 생각을 꺼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박근형의 마스터클래스는 거장이 몸소 정리한 배우론이자 연기론이었다. 그는 배우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이제 막 첫발을 디딜 때 많이 나타나는 모방적 배우, 역할의 내면을 재창조해 자기 영혼을 불어넣는 ‘창조적 배우’, 연기의 모든 기술을 익혀 과장된 연기를 하는 ‘직업 배우의 유형’이다. 박근형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악극단이 와서 공연하는데, 그들을 보고 나의 첫 연기도 시작해 지금도 창조적 배우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며 후배들에게 ‘창조적 배우’의 길을 갈 것을 주문했다.
연기의 기본은 행동(Action)이다. 그는 “연기는 액팅이라며, 감동을 주기 위해선 움직여야 하는데 무엇보다 ‘행동의 동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엄청난 상상력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박근형이 체득한 노하우는 ‘만약에(if)’라는 마법이다.
‘연극내일 프로젝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연기의 출발점은 늘 ‘만약’이에요. ‘만약에 내가 이 사람이라면’이라는 전제 아래 배우는 무수히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어요. 그 뒤엔 주어진 환경을 고민해야 해요. 이걸 평생 잊으면 안 돼요. 그런데 그 인물에게 주어진 환경이라는 것은 늘 대본 안에 있으니, 밖에서 찾을 생각을 하지 마세요.”
수험생으로 치자면, ‘교과서’가 최고의 스승인 셈이다. 그러니 “어떤 배우들은 뒷주머니에 대본 찔러놓고 연습하는데, 정말 천재인 것 같다”는 노장 배우의 일갈은 역설로 들린다.
60년 넘게 현장을 지킨 그가 무대와 촬영장에서 고수하는 철칙은 ‘조화’다. 기술을 넘어 태도로 향해야 ‘진짜 연기’도 시작된다는 것이다. 동료 배우와 눈을 맞춰 진심으로 교류하고, 무대 위에서 ‘앙상블’을 이룰 때 ‘제7의 예술’인 연극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애드리브는 아주 못된 버릇이에요. 절대로 하면 안 돼요. 지금도 난 애드리브를 하려고 할 땐 사전에 양해를 구해요. 조화를 해치고, 나만 빛나려 흐름을 깨는 건 금물이에요.”
노장 배우들의 기부, 청춘의 내일을 열다
“제가 어릴 적엔 연습도 안 하고, 땡땡이치는 걸로 연극계에서 아주 유명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제 나이를 먹고 난 지금에서야 연기에 눈을 떴어요.”
반세기도 전의 일이었다. 그때는 연기를 배울 스승도, 책도 없었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답답한 시절을 보낸 것은 노배우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시절 ”연극을 해보자“며 무모하게 덤벼든 세계와 사랑에 빠졌고, TV 시대가 열린 후엔 생계를 위해 방송에 진출했으나, 박근형은 당시를 참담했던 시기라고 떠올린다.
“차별과 수모, 배고픔을 해결하려 고군분투하던 때였어요. 그런데 지금 대학로에 후배들이 그 시절 우리보다 더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더라고요.”
‘연극내일 프로젝트’는 그의 경험이 거울이 돼 시작됐다. 지난해 5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흥행 주역인 두 배우 신구·박근형은 “후배들을 돕고 싶다”는 의지를 모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 ARCO)와 의기투합했다. 국립극장에서의 기부 공연 회차를 특별 편성해 재능 기부로 무대에 올랐고, 당시의 티켓 수익금 전액이 아르코에 기탁해 연극내일기금이 태어났다.
아르코는 이를 바탕으로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인 ‘연극내일 프로젝트’를 출범, 오디션을 통해 함께 할 ‘청년 배우’들을 찾았다. 장장 4개월간 체계적인 연극 교육을 받은 뒤, 세 연출자(강훈구, 김정, 오세혁)와 팀을 이뤄 세 편의 연극으로 마무리되는 일정이다.
‘연극내일 프로젝트’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30명의 청년 배우와 만난 배우 박근형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지원자들의 면면은 다양하나, 고민은 닮아 있었다. 박근형의 젊은 날처럼 먹고사는 어려움, 연기 예술의 벽을 체감한 청년들이 지원서를 냈다.
프로젝트 합격자 중 맏형인 김형균(36)은 생계와 꿈 사이에서 고민하다 마지막 도전을 결심했다. 그는 “수영 강사로 생계형 아르바이트와 연기를 병행하며 회의감이 들어 이젠 연기를 그만할 때가 아닌가 고민할 무렵이었다”며 “4개월간 온전히 나와 무대에 집중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 지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디즈니 플러스 ‘탁류’, 연극 ‘렛 미 인’ 등 매체와 무대를 오가며 활동한 안승균(32)은 의외의 지원자였다. 그는 “정식 연기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기본기에 대한 갈증이 컸다”며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싶어 지원했다”고 귀띔했다.
자신을 ‘배움 중독자’라고 말한 황수경(28)은 예고를 나와 대학에서도 연기과를 다녔다. 끊임없이 연기 워크숍을 전전했지만 그는 “계속 먹기만 하고 소화는 못 시키는 느낌”이었다고 털어놨다. 그에게 필요했던 건 ‘일회성 기술’ 전수가 아니라,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동료’와 긴 호흡의 ‘과정’이었다. 그는 “이곳에서도 30명의 동료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기대됐다”고 했다.
00년생 막내 신윤철(26)은 연기에 첫 발을 디딘 이후 넘지 못한 ‘예술의 벽’에 몇 번이고 부딪혔다. 그는 “연기 레슨에 쓴 돈만 1000만원이 넘는데 지난해 고등학교 1학년 친구의 청소년극 연기를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 그만두려 했다”고 돌아봤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재능의 벽’을 느꼈던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 위한 의지의 발로였다.
삶의 모든 날을 관통해 온 귀한 강연은 ‘새싹 배우’들의 추동 엔진이자 치유와 위로의 시간이었다. 안승균은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서 후배들을 향한 진심 어린 걱정과 응원이 느껴져 주체할 수가 없었다”고 했고, 김형균은 “여든이 넘는 나이에도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눈이 반짝거리셨다”며 “그 호기심과 순수함이 선생님을 거장으로 만들었구나 싶었다고” 했다.
박근형은 어린 배우들의 연극계 입성을 아낌없이 환영했다. 그는 “배우는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며 “이성을 갖춘 인간. 외골수로만 가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새싹 배우들의 가슴에 다시 불을 지폈다.
“고생길에 들어선 걸 환영합니다. 어떤 때는 죽고 싶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뛸 듯이 기쁠 때도 있을 거예요. 또 어떤 때는 내가 나를 주체하지 못할 겁니다. 그 어떤 재물로도 바꿀 수 없는 정신적 희열은 나만이 느끼는 거예요. 여러분은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꼭 훌륭한 배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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