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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덕의 공유주방] [3] 칼은 거들 뿐

조선일보 유재덕 파불루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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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자/여론4/유재덕 공유주방

21일자/여론4/유재덕 공유주방


요리사에게 칼은 화가의 붓과 같다. 화가는 붓으로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요리사는 칼로 식재료를 다듬어 접시에 그려낸다. 한때 요리사들 사이에서 고급 칼을 갖는 게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나 역시 장비 욕심을 낸 시절도 있었다. 어쩌면 내 실력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명품 칼의 아우라 뒤에 나를 숨기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메뉴 개발 보직을 맡고 뉴욕 출장을 갈 때면 반드시 들르던 곳이 있었다. ‘뉴욕 요리사들의 성지’로 불리는 가게 J.B. Prince였다. 뉴욕 최신 요리 트렌드를 분석하기 위해 하루 다섯 끼씩 요리를 먹다 보니 혀가 먼저 지쳐버렸고, 감각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어 그곳을 찾아갔다. 진열대에 놓인 칼 하나를 손에 쥐는 순간,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적당한 무게와 균형, 손끝에 전해지는 섬세한 감각. 그 칼에는 음악 같은 리듬이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그 칼을 들고 계산대로 갔지만, 계산기에 찍힌 숫자를 보는 순간 멈칫했다. 칼 한 자루의 가격이 무려 1200달러였다. 나는 그것을 120달러로 착각한 거다. 갑자기 자식들 얼굴이 떠올랐다. ‘이 돈이면 한우 갈비를 몇 번이나 사줄 수 있나?’ 그 칼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가게를 나왔다.

이후 나는 칼에 대한 욕심을 아예 접기로 했다. 특급호텔의 총주방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쓰는 칼에 대해 궁금해하며 묻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수백만 원에 이르는 명품 칼을 쓰지 않겠느냐고 짐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20만원이 넘는 칼을 써본 적이 없다. 자주 바꾸지도 않는다. 그러고 보니 비싼 칼을 쓰지 않아서 요리가 부족해진 적도 없었다.

칼은 요리를 대신해주지 않는다. 무엇을 덜어낼지, 어디서 멈출지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좋은 도구는 손을 편하게 해줄 수는 있어도 판단까지 해주지는 않는다. 어떤 칼을 쥐는지보다, 그 칼 앞에서 얼마나 겸손해질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요리사의 칼 /유재덕 제공

요리사의 칼 /유재덕 제공


[유재덕 파불루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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