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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호남문헌 등 ‘10만점’ 모았지만…둘 곳 없는 셋방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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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호남진흥원이 수집 자료 10만점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달 8일 광주시 광산구 복합문화공간 아이와즈에서 연 대표 수집자료 전시에서 기탁자들이 고문서를 살펴보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한국학호남진흥원이 수집 자료 10만점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달 8일 광주시 광산구 복합문화공간 아이와즈에서 연 대표 수집자료 전시에서 기탁자들이 고문서를 살펴보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1558년 10월 성균관 대사성(성균관의 장)이었던 퇴계 이황(1502~1571)에게 갓 과거에 급제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30대 초반의 이 젊은이는 곧장 이황에게 성리학의 오랜 난제 ‘사단칠정’과 ‘이기’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조선 최고의 지성으로 꼽혔던 이황은 젊은이의 물음을 내치지 않고 경청한 뒤 넌지시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이듬해부터 8년간 두 사람은 100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치열하게 논쟁한다. 이른바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변’이다.



지난달 8일 광주시 광산구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아이와즈에서는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변’을 담은 ‘양선생문답첩’ 등 한국학호남진흥원(이하 진흥원)이 확보한 대표적인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다. 자료 수집 10만점 달성을 기념해 마련한 자리다.



홍영기 원장은 ‘양선생문답첩’을 가리키며 “광주 기대승 종가에서 2023년 기탁한 ‘기대승 종가 소장 문적’에 포함된 것으로 고봉과 퇴계가 주고받은 편지와 한시를 담은 첩본”이라며 “고봉과 퇴계의 필적을 나란히 감상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자료다. 현재 광주시 유형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는데 보물 승격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진흥원이 보관하고 있는 또 다른 대표 자료인 ‘기건 고신(조선시대 관직 임명장)’은 세종 30년인 1448년 기건(?~1460)을 전라도 도관찰출척사(지금의 도지사)로 임명하는 내용이 나온 옛 문서다. 세종의 도장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게 특징이다. 기건은 기대승의 먼 선조로, 전남 장성 행주 기씨 금강종가에서 기탁한 자료다.



한국학호남진흥원이 지난달 말 개최한 ‘열린 수장고’ 행사에서 시민들이 호남 지역 기록유산을 살펴보고 있다. 한국학호남진흥원 제공

한국학호남진흥원이 지난달 말 개최한 ‘열린 수장고’ 행사에서 시민들이 호남 지역 기록유산을 살펴보고 있다. 한국학호남진흥원 제공


그 밖에 1389년 무학대사가 간행한 불경사전 ‘장승법수’, 1434년 발급한 무과 합격증서인 ‘김수연 왕지’, 정유재란 때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영광 출신 수은 강항(1567~1618)이 일본에서 보고 들은 풍속, 지리, 군사 정세 등을 기록한 일기 ‘간양록’ 등은 진흥원이 소장한 보물급 유물로 꼽힌다.



2018년 광주시와 전남도가 공동으로 설립한 한국학호남진흥원이 지난달 1만4455점을 확보하며 개원 8년 만에 누적 수집 자료 10만1696점을 기록했다. 전국 국학진흥기관 중 경북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68만여점)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규모다.



홍 원장은 “호남에도 고문서 등이 많았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동학혁명, 여순사건, 6·25전쟁 등을 거치며 상당수 종가가 피해를 봐 자료가 소실됐을 것으로 본다”고 분석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자료들도 대부분의 후손이 외부로 내놓길 꺼리는 분위기 속에서 진흥원이 자료 10만점을 확보하기까지 연구원들의 끊임없는 설득과 노력이 있었다.



행주 기씨 금강종가 기용철씨는 “아버지께서 선대 자료는 자녀들도 만지지 못하게 하셨다. 우리 집 자료가 500년 동안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며 “아버지가 진흥원 직원들의 노력에 감복해 2018년 개원에 맞춰 자료를 기탁하라고 명하셨던 때를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말했다.



광주 기대승 종가에서 2023년 한국학호남진흥원에 기탁한 ‘기대승 종가 소장 문적’ 중 ‘양선생문답첩’.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변’이 담긴 서신이다. 한국학호남진흥원 제공

광주 기대승 종가에서 2023년 한국학호남진흥원에 기탁한 ‘기대승 종가 소장 문적’ 중 ‘양선생문답첩’.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변’이 담긴 서신이다. 한국학호남진흥원 제공


안동교 진흥원 자료교육부장은 “진흥원 설립 전 개인이나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기록자료들은 항온·항습·소방 시설 등을 갖추지 못해 훼손 위기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고서·고문서·고서화 등의 문화재적 가치가 급상승하면서 절도도 심심찮게 일어났다고 했다.



진흥원 설립으로 훼손 위기의 옛 자료들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좁은 수장고는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다. 진흥원은 설립될 때 자체 건물을 마련하지 않고 광주광역시인재교육원 강의실동 3~4층에 자리잡았다. 3층은 수장고, 4층은 연구·자료실이다. 수장고 규모는 330㎡(100평)로 진흥원 쪽은 1년에 1만점 수집 추세로 봤을 때 2~3년 이내에 꽉 찰 것으로 내다봤다.



홍 원장은 “건물이 노후화해 그나마 가벼운 고문서는 괜찮지만 근현대 서적은 수집이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며 “독립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각 지자체와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광주시 광산구 광주광역시인재교육원에 자리한 한국학호남진흥원 수장고. 한국학호남진흥원 제공

광주시 광산구 광주광역시인재교육원에 자리한 한국학호남진흥원 수장고. 한국학호남진흥원 제공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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