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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서의 돌봄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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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강 | 고려대 교수(행정학)



‘정의’는 단일한 개념이 아니며, ‘무엇이 정의로운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게 경합하며 발전했다. 현대 정의론의 지형은 크게 두 계통으로 나뉜다. 하나는 재화, 권리, 기회 등 유한한 자원을 어떻게 공정하게 분배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구성원 간의 관계가 얼마나 평등하고 상호 존중적인지에 집중하는 ‘관계적 정의’(relational justice)이다.



한국 사회의 정의 담론은 이제껏 능력과 노력에 따른 보상을 강조하며, ‘분배적 정의’ 계통에 속하는 ‘공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입시, 취업, 승진 등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공정은 자원 배분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핵심 가치이자, 노력에 따른 정당한 대가라는 믿음 아래 우리 사회의 분배 체계를 지탱하는 강력한 논리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정의 잣대가 과연 우리 사회 곳곳에 잠복한 구조적 불평등과 약자들의 고통을 온전히 진단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의 반복되는 죽음이나 저임금과 열악한 환경에 놓인 돌봄노동자들의 현실은 절차적 공정이나 능력주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구조적 모순을 드러낸다. 공정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이 불편한 진실은, 자칫 분배적 정의가 강자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한편, 취약한 이들의 존재와 고통을 시야에서 지워버리는 한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정의가 자원 배분의 문제를 벗어나 인간의 상호 의존성과 취약성에 대한 근본적 인식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걸음 나아가 우리는 노력과 성과에 따른 분배라는 협소한 틀을 넘어, 인간의 관계를 보듬고 공동체의 회복을 지향하는 ‘정의로서의 돌봄’으로 시선을 확장해야 한다. 돌봄은 복지나 노동의 범주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적 정의’의 계통 안에서, 우리 사회의 고착화된 구조적 불평등 문제를 직시하고 민주주의를 심화할 수 있는 새로운 정의 담론으로 자리매김한다. 정의로서의 돌봄은 사회적으로 음소거된 목소리를 경청하고, 모든 이가 존엄한 관계를 맺으며 함께 살아가는 포용적인 공동체의 회복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 첫걸음은 ‘경청’이다. 하청노동자의 절규, 발달장애인 부모의 눈물,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돌봄노동자들의 고단함은 개인의 불만이나 사회의 평온을 흔드는 소음으로 치부될 수 없다. 이는 우리 사회 시스템의 병든 부분, 즉 구조적 부정의를 알리는 뼈아픈 경고음이다. 정의로서의 돌봄은 이러한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귀 기울여 듣는 인간애에서 출발한다. 이는 타인의 고통을 내면화하고, 그 고통이 우리 사회의 어떤 구조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성찰하는 과정이다.



둘째는 ‘응답’이다. 경청을 통해 인지한 약자들의 필요에 대해 시혜나 동정에 머물지 않고, 민주적 소통을 통해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는 책임을 뜻한다. 일례로, 천원의 아침밥 같은 제도는 저렴한 식사 제공을 넘어 그 밥상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자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정당한 대우로 화답하는 사회적 응답이 되어야 한다. 모든 구성원이 서로의 필요에 책임감 있게 반응하며 공존의 해법을 모색하는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다.



셋째는 ‘연대’이다. 정의로서의 돌봄은 누군가의 고통을 그저 개인의 불행으로 치부하지 않고, 우리 공동체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로 받아들이는 시민적 연대로 이어진다. 경비원을 향한 일부의 갑질에 맞서 일터를 함께 지켜낸 아파트 주민의 노력이나, 청소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에 목소리를 보탠 대학생들의 실천은 타인을 살피는 돌봄이 어떻게 사회적 힘으로 확장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연대는 개인의 성공과 경쟁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며 더 나은 구조를 함께 만들어가는 실천이다.



이제 우리는 ‘누가 더 많이 가질 자격이 있는가’를 따지는 공정의 틀을 깨고, ‘어떻게 서로 돌보며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정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정의로서의 돌봄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담고, 그들의 필요에 책임 있게 반응하며, 부정의한 구조를 함께 바꾸는 실천적 담론이다. 우리가 서로의 취약함을 보듬으며 관계의 온기를 회복할 때, 정의는 비로소 우리의 일상을 인간다운 의미로 채우는 가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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