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K-웨이브(K-Wave)’의 시대다. K-팝과 드라마에 매료된 것을 넘어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호기심을 갖고 삶의 터전을 옮기려는 외국 청년들이 급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뜨거운 열망은 한국 사회의 국경 앞에서 차갑게 식어버린다. 글로벌 문화 강국이라는 위상이 무색하게 그들을 맞이하는 우리의 제도적 토양은 여전히 과거의 관성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장의 대학들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 관계자들은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는 ‘생활 언어’와 대학 강의를 듣고 리포트를 쓰는 ‘학습 언어’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미 많은 대학이 자체적으로 ‘예비 대학 과정’이나 ‘조건부 입학 제도’를 만들어 유학생들의 한국어 실력과 기초 학력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학들의 노력은 ‘제도의 한계’라는 벽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다. 대학이 아무리 좋은 교육 과정을 설계해도, 그것을 뒷받침할 비자(Visa) 시스템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현장 경험의 불법화’다. 이것은 단순한 행정 규제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교육관의 문제다. 지식의 습득과 암기가 경쟁력이던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생성형 AI가 지식을 무한대로 생산해내는 이 시대에, 개인의 진정한 성장은 강의실 밖에서 일어난다. 실제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생각이 다른 타인과 부딪히는 ‘경험’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최고의 교육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외국 청년들에게 한국을 배우라고 하면서 정작 성장의 핵심 동력인 ‘일할 기회’와 ‘경험할 기회’는 법으로 막아놓았다. 현행법상 어학연수생(D-4 비자) 신분으로 기업 인턴십이나 현장 실습을 하는 것은 엄격히 제한되거나 불법이다. “AI 시대에 걸맞은 창의적 인재가 되라”고 가르치면서 제도적으로는 “책상에 앉아 단어나 외우라”고 강요하는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다.
또한 ‘TOPIK(한국어능력시험) 만능주의’ 역시 대학의 발목을 잡는다. 제도는 여전히 숫자뿐인 점수를 요구한다. 그 결과 기출문제 암기로 점수만 높은 ‘무늬만 우등생’들이 양산된다. 이들은 강의실에서 교수의 농담은커녕 전공 용어조차 이해하지 못해 좌절하고, 기업은 “소통이 안 된다”며 외면한다. 높은 진입 장벽을 세워놓은 듯 보이지만, 실상은 ‘학습 수학(修學) 능력’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하는 ‘허술한 거름망’인 셈이다.
이것이 개별 대학의 자구책을 넘어 국가 차원의 ‘한국형 패스웨이(K-Pathway) 제도’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다.
K-패스웨이는 ‘무자격자’를 대학에 쉽게 넣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잠재력 있는 학생을 선발하되, 대학 본과 진입 전 단계에서 6개월에서 1년 동안 혹독한 ‘적응 훈련’을 거치게 하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대학 수학에 필수적인 ‘학습 언어’를 집중적으로 훈련받는다. 동시에 ‘K-패스웨이 비자(가칭)’를 신설하여 합법적인 기업 인턴십과 현장 실습을 병행하게 해야 한다. 교실에서 배운 한국어를 현장의 ‘일’을 통해 체화하고,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한국 사회의 맥락을 몸으로 익히게 해야 한다. ‘일과 학습의 결합’이야말로 AI 시대에 가장 빠른 언어 습득법이자 적응 훈련이다. 이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한 학생에게만 본과 입학을 허가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엄격하고 실질적인 학력 질 관리가 가능하다.
이는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과 대학에도 새로운 돌파구다. 지방 대학의 기숙사와 강의실을 패스웨이 거점으로 활용하고, 지역 기업이 현장 실습처를 제공하는 ‘산·학·관 협력 모델’을 구축한다면 외국 청년은 안전한 성장의 기회를 얻고 지역 사회는 젊은 활력을 되찾는 선순환이 가능해질 것이다.
세계는 지금 인재 유치 전쟁 중이다. AI와 기술의 발전으로 국경의 의미가 희미해진 지금, 인재들은 자신에게 ‘일할 기회’와 ‘성장의 경험’을 주는 곳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낡은 규제의 눈치를 보며 대학이 반쪽짜리 교육을 하게 내버려 둘 것인가.
대학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는 정부가 답할 차례다. ‘지식 암기형 교육’에서 ‘경험 중심의 현장 교육’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비자 규제라는 족쇄를 풀고 ‘한국형 패스웨이’라는 넓은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저출생과 인구 절벽 앞에 선 대한민국이 선택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다.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 학사·석사, 영국 뉴캐슬대 도시계획학 박사
·전 국토연구원 연구위원, 전 한국도시행정학회장, 전 경실련 정책위원장
·전 서울시립대 총장, 교무처장, 도시과학대학장
※He is···
도시계획 및 행정 전문가로서 서울시립대 총장 재임 시절부터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대학의 위기와 지역 소멸 문제를 고민해왔다. 현재는 AI 시대에 부합하는 ‘일과 학습의 병행’ 모델, 그리고 외국인 인재들이 한국 사회에서 실전 경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한국형 패스웨이’ 시스템 구축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칼럼 고정 제목인 파이데이아 (Paideia)는 ‘이상적인 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다.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도시(폴리스) 구성원으로서 갖춰야 할 교양과 인격을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교육’과 ‘도시’라는 두 주제를 아울러 칼럼을 집필할 예정이다.
서경IN sk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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