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 영문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탈락자는 곧 '패자'로 소비된다. 카메라는 눈물을 클로즈업하고, 자막은 '충격 탈락'을 강조한다. 하지만 정작 그 무대를 빛나게 만든 것은 수많은 도전자의 시도와 실패였다. 탈락 없이는 경쟁도, 성장도, 최종 우승자의 의미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국가 정책에서도 이 단순한 원리를 받아들이고 있을까?
정부가 '국가대표 인공지능(AI)'을 뽑겠다며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이하 독파모) 사업을 출범시켰을 때, 많은 이들은 이를 한국형 AI 생태계를 도약시키기 위한 전략적 경쟁 시스템으로 이해했다. 경쟁이 있는 이상 합격과 탈락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은 애초에 설계에 내장된 결과다.
임기범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대학교 객원교수 |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탈락자는 곧 '패자'로 소비된다. 카메라는 눈물을 클로즈업하고, 자막은 '충격 탈락'을 강조한다. 하지만 정작 그 무대를 빛나게 만든 것은 수많은 도전자의 시도와 실패였다. 탈락 없이는 경쟁도, 성장도, 최종 우승자의 의미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국가 정책에서도 이 단순한 원리를 받아들이고 있을까?
정부가 '국가대표 인공지능(AI)'을 뽑겠다며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이하 독파모) 사업을 출범시켰을 때, 많은 이들은 이를 한국형 AI 생태계를 도약시키기 위한 전략적 경쟁 시스템으로 이해했다. 경쟁이 있는 이상 합격과 탈락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은 애초에 설계에 내장된 결과다.
최근 1차 평가 결과가 발표되며 LG AI연구원, SK텔레콤, 업스테이지가 2단계에 진출했고, 네이버클라우드와 NC AI는 탈락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탈락팀을 포함해 1개 정예팀을 추가로 선발하겠다고 밝히며 이른바 '패자부활전'을 예고했다. 최초 공모에 참여했던 컨소시엄과 이번 1차 단계평가 이후 정예팀에서 탈락한 네이버클라우드, NC AI, 그 외 역량 있는 기업 등을 대상으로 올해 상반기 중 추가 공모를 진행해 4개 팀 경쟁 체제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이 구상을 곧이곧대로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제도"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상반기 안에 추가 1개 팀을 뽑겠다는 것은 동시에 상반기 안에 또 하나의 탈락팀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정과 구조를 예약해 놓은 일이기도 하다. 촉박한 시간 안에 다시 공모·평가·선정을 반복하면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패를 제대로 분석하고, 남길 것을 남기고, 다음 단계 설계에 반영할 여유를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미 시장의 반응은 미묘하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재도전 계획이 없다고 못을 박았고, NC AI 역시 추가 공모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실익이 불분명하다"는 것이지만 그 뒤에는 훨씬 노골적인 현실이 있다. 이 구조 안에서 '탈락'은 곧 '실패'로 소비되고, 그 실패는 학습 자산이 아니라 평판 리스크로만 남는다는 집단적 학습 효과다.
경쟁형 R&D 사업에서 탈락은 결함이 아니라 기능이다. 제한된 예산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여러 가설과 시도를 병렬적으로 돌리고, 성과와 잠재력을 비교해 포트폴리오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떨어진다. 떨어지는 팀이 존재해야 선정된 팀의 의미도 생기고 전체 시스템이 학습할 데이터도 축적된다. 다시 말해 "탈락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이는 시스템이 설계된 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에 가깝다.
문제는 이를 해석하고 전파하는 언어다. 이번 독파모 1차 평가를 둘러싼 기사 제목들에는 '이변', '충격 탈락', '패자부활전', '재도전 포기' 같은 표현들이 넘쳐난다. 이런 언어는 "경쟁 과정에서의 탈락"과 "전략 자체의 실패, 기술력의 열세"를 의도적으로 뒤섞는다. 그 결과 시장과 대중의 인식 속에서 "독파모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은 "국가대표 AI 경쟁에서 이미 뒤처진 기업"이라는 낙인으로 변환된다. 이 구조에서 누가 두 번 탈락을 감수하며 재도전에 나서겠는가. 기업들은 기술적 리스크보다 평판, 정치, 홍보 리스크를 더 두려워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선택이 표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사실 이 상황은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필자는 지난해 8월, 이 사업의 공모가 시작되던 시점에 이 지면을 통해 "국가대표 AI 선발전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탈락을 전제로 한 실패를 용인하되 그 실패가 남긴 결과와 성과물을 체계적으로 남기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글을 쓴 바 있다. 그때 특히 강조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경쟁형 선발전의 구조상 일정 비율의 탈락은 반드시 발생하므로 탈락 자체를 실패로 취급하는 프레임을 버려야 한다는 점. 둘째, 탈락한 팀이 남긴 모델, 데이터, 실험 결과, 검증된 가설과 한계까지도 사업의 자산으로 수렴하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게도 그 우려가 그대로 현실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몇 년간 정부는 "R&D 실패를 용인하는 환경을 만들겠다", "실패를 허용해야 제대로 된 연구개발이 가능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대전에서 열린 '다시 과학기술인을 꿈꾸는 대한민국' 국민보고회에서 "실패를 용인하는 연구개발 환경을 만들겠다"며 과정이 의미 있었다면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도 검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최근 과학기술계에서도 R&D 실패를 관리 대상이 아니라 학습과 자산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체감되는 구조는 정반대다. 평가는 여전히 단기 성과와 성공률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고, 언론 서사는 탈락과 실패를 극적 소비의 소재로 활용한다. 재도전은 "학습을 증명하는 선택"이 아니라 "위험한 도박"으로 인식된다. 이번 독파모 1차 탈락과 추가 공모를 둘러싼 논란은 이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정책 담론에서는 "실패를 자산화하자"고 말하면서도 언론과 평판의 실제 메커니즘에서는 "실패하면 책임과 낙인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으로 남는다. 이 구조가 유지되는 한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는 슬로건으로만 존재할 뿐 현장의 연구자와 기업에는 "실패하면 끝나는 시스템"으로 작동하게 된다.
독파모 사례에서 정말 중요한 질문은 "누가 붙었고, 누가 떨어졌는가"가 아니다. 진짜 물어야 할 질문은 "떨어진 팀이 무엇을 남겼고, 시스템은 그것을 어떻게 회수하고 있는가"이다. 경쟁형 R&D에서 탈락을 자산화하려면 최소한 몇 가지 장치가 필요하다.
첫째, 탈락팀의 기여를 공식적으로 기록하는 제도다. 어떤 기술적 시도와 가설이 검증되었는지, 어떤 벤치마크나 데이터, 도구가 개발되었는지, 어떤 한계와 리스크가 드러났는지를 "실패한 팀의 실적"이 아니라 프로젝트 전체의 지식 자산으로 문서화해야 한다. 둘째, 재도전을 '낙인'이 아닌 '학습의 증거'로 인정하는 프레임이다. 재도전 팀에 대해서는 "얼마나 학습했고, 무엇을 개선했는가"를 보는 별도의 평가 축이 필요하다. 두 번 떨어졌다고 해서 "두 번 실패한 팀"이 아니라, 두 번에 걸쳐 가설을 검증하고 데이터를 축적한 팀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정부가 말하는 패자부활전은 이런 원칙과는 거리가 있다. 일정만 놓고 보면 상반기 내에 또 다른 탈락을 만들어야 하는 짧은 경쟁 한 번을 더 얹어놓은 것에 가깝다. 셋째, 정보 비대칭을 줄이는 투명성이다. 현재처럼 점수 일부만 공개하고 탈락 사유를 뭉뚱그려 전하는 구조에서는 실패는 곧 설명 불가능한 리스크가 된다. 기업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탈락을 한 번 경험하면, 그다음부터는 그 시스템 자체를 회피하려 든다. 이는 장기적으로 국가 R&D 시스템의 신뢰를 갉아 먹는다.
언론 또한 이번 사건을 다루면서 적어도 두 가지를 의식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탈락했다"는 사실과 "실패했다"는 평가의 구분이다. "네이버클라우드와 NC AI가 1차 평가에서 탈락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대표 AI 경쟁에서 밀렸다", "충격 탈락" 같은 표현은 이미 해석과 프레이밍이다. 이 경계를 넘는 순간 언론은 단순한 사실 전달자가 아니라 낙인 생산자가 된다. 둘째는 개별 기업의 성패와 시스템 설계의 성과 및 한계를 구분하는 것이다. 지금 더 중요한 질문은 "이번 평가와 공모 시스템이 '실패를 용인하는 구조'와 얼마나 부합하는가"이다. 탈락 기업을 흥행 소재로 소비할 것이 아니라 평가 기준의 타당성, 재도전 제도의 설계, 실패 자산의 축적 방식을 집요하게 묻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독파모는 한 번으로 끝나는 이벤트가 아니라, 앞으로 수년간 이어질 국가 단위 AI 전략 실험의 출발점이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도전적인 연구를 장려하고, 실패를 자산으로 축적하며, 재도전을 장려하는 생태계를 만들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손봐야 할 것은 "탈락을 다루는 방식"이다. 탈락한 팀이 조용히 사라지는 구조에서는 아무리 "실패를 용인하겠다"고 말해도 실패는 늘 "당사자만 떠안는 리스크"로 남는다.
탈락을 설계한 시스템의 책임, 탈락에서 배운 것을 공유하는 구조, 탈락했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명예로운 통로가 마련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는 실패를 용인한다"는 말을 정책 슬로건이 아닌 시스템 설계로 증명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이 지면에서 그 필요성을 미리 제기했던 것처럼 지금 독파모를 둘러싼 논란은 그 논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임기범 인공지능 전문가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대학교(aSSIST) 객원교수 ▲ 현 AI경영학회 상임이사 겸 학술분과 위원장 ▲ ㈜나루데이타 CTO 겸 연구소장 ▲ ㈜컴팩 CIO ▲ 신한 DS 디지털 전략연구소장 역임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연합뉴스 앱 지금 바로 다운받기~
▶네이버 연합뉴스 채널 구독하기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