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대만의 TSMC 시설을 사실상 자국에 흡수하려는 야욕을 보이는 가운데 한국이 강점을 갖는 메모리반도체 부문에서도 강한 확장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100% 반도체 관세 부과 카드로 위협하면서, 미국 마이크론의 D램 생산량만 크게 늘릴 채비에 나섰다. 국내 업계에서는 높은 인건비, 소재·부품·장비 조달 비용 등을 감안할 때 미국 내에서 메모리반도체 제조 사업을 더 이상 늘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고 있다. 관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수용 여부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뒤 조선, 자동차, 휴대폰 등 거의 모든 제조업에 동일한 압박을 가하면서 관세와 대미 직접 투자 부문에 대해 크게 양보한 적이 없다. 메모리반도체 산업조차 자국화 작업에 속도를 낼 공산이 크다는 뜻이다. 미국 행정부는 한국과 대만이 인공지능(AI) 시대에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춘 메모리·비메모리반도체 부문을 전략 물자화할 가능성을 견제하는 모양새다. 사상 유례가 없는 호황을 누리는 메모리반도체 업계 입장에서는 오는 11월 3일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의 정치적 고려가 사업의 최대 걸림돌로 부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 일본, 대만처럼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있다는 한국의 약점을 이용해 압박 수위를 높일 경우 반도체 투자와 관련한 한미 재협상 판이 조성될 수도 있다.
마이크론, 역대 최대 美반도체 공장 착공 이어 대만 D램 시설도 인수 박차
마이크론은 지난 17일(현지 시간) 홈페이지에 공지문을 올리고 이 회사가 이날 대만 먀오리현 통루오에 있는 반도체 업체 PSMC의 ‘P5 공장’을 현금 18억 달러(약 2조 6500억 원)에 인수하는 독점 의향서(LOI)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이 거래에는 30만 제곱피트(2만 7871㎡) 규모의 300mm 클린룸이 포함됐다. 마니쉬 바티아 마이크론 글로벌 운영담당 수석부사장은 “클린룸의 전략적 인수는 현 대만 사업을 보완해 수요가 공급을 계속 초과하는 시장에서 생산을 늘려줄 것”이라며 “통루오 공장은 마이크론 타이중 부지와도 가까워 대만 사업 전반에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마이크론은 이번 거래가 규제 승인을 거쳐 올 2분기 안에 완료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거래가 완료된 뒤에는 해당 부지에 단계적으로 D램 생산 설비를 구축하고 증산할 계획이다. 마이크론은 PSMC의 P5 공장에서 D램 생산이 본격적으로 늘어날 시기를 내년 하반기로 예측했다. 마이크론은 “증가하는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마이크론은 이보다 하루 앞서 지난 16일에도 뉴욕주에 1000억 달러(약 146조 원)를 들여 미국 역대 최대 규모의 반도체 제조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해당 부지의 면적은 서울 여의도(약 2.9㎢)의 두 배 수준인 약 5.67㎢로 알려졌다. 뉴욕의 지역 언론인 더포스트스탠더드의 온라인 플랫폼 시러큐스닷컴은 마이크론이 첫 공장을 2030년 가동하고 두 번째 공장은 2033년 열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세 번째 공장은 2038년, 마지막 네 번째 공장은 2045년에 완공한다. 마이크론은 2022년 10월 해당 사업 계획을 발표할 당시 이 시설을 두고 “앞으로 10년간 미국산 최첨단 D램 생산량을 전 세계 생산량의 40%까지 늘리려는 전략의 일환”이라고 소개했다. 16일 착공식에는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도 참석해 트럼프 행정부의 높은 관심을 반영했다.
바티아 부사장은 당시 D램 공장 기공식 뒤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AI 가속기에 들어가는 고대역폭 메모리(HBM)가 업계 전반의 가용 생산능력을 엄청나게 흡수하면서 스마트폰과 PC 같은 기존 산업용 메모리반도체의 심각한 공급 부족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며 “스마트폰과 PC 제조사들이 내년 이후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고 알렸다. 이어 "자율주행차와 휴머노이드 로봇이 메모리반도체 수요를 더욱 키울 것 같다”며 “우리가 보고 있는 공급 부족은 정말 전례 없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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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용 HBM 대응에 범용 메모리 역대 최고 품귀 현상···3대 업체 엎치락뒤치락
마이크론은 최근 품귀 현상으로 천정부지로 솟은 메모리반도체 가격에 힘입어 미국의 그 어느 기업보다 높은 수익을 내고 있다. 마이크론이 지난해 12월 17일 장 마감 뒤 공개한 2026 회계연도 1분기(9월~11월) 실적에 따르면 이 회사는 이 기간 매출이 2024년 같은 기간보다 57% 급증한 136억 달러(약 19조 7600억 원)를 기록했다. 메모리반도체 호황기를 감안해 월가에서 낙관적으로 잡았던 예상치 130억 달러조차 뛰어넘는 성적이었다. 마이크론은 나아가 2분기 매출 전망치를 이보다 더 좋은 183억~191억 달러(약 26조 5900억~27조 7500억 원)로 제시했다. 이 역시 시장 예상치인 144억 달러를 크게 넘어서는 수치였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마이크론 최고경영자(CEO)도 당시 실적발표회에서 “공급 부족과 지속적이고 강한 수요가 메모리반도체 시장 상황을 빡빡하게 만들고 있다”며 “이런 상황이 2026년 이후에도 계속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예고했다.
문제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메모리반도체 3대 회사가 예외없이 호황을 누리는 상황을 미국 정치권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 정치권은 HBM과 최신 D램·낸드플래시가 엔비디아와 AMD, 브로드컴 등이 만드는 AI 가속기·서버의 전략 물자처럼 떠오르면서 이 공급망을 아예 자국으로 끌어와야 한다는 인식을 내비치고 있다. 마이크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국내 생산량도 상당 부분 미국으로 옮기게 하겠다는 복안이다.
시장조사 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매출 기준으로 마이크론의 지난해 3분기 글로벌 HBM 시장 점유율은 21%로 SK하이닉스(57%), 삼성전자(22%)에 이은 3위다. 3분기 HBM을 포함한 D램 시장 전체 점유율은 SK하이닉스(34%), 삼성전자(33%), 마이크론(26%) 순이다. 이 순위는 지난해부터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어 한순간에 뒤집힐 수도 있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메모리반도체 비용이 상승하면서 올해 전 세계 스마트폰 출하량이 2.1% 감소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메모리반도체 품귀 현상은 엔비디아의 ‘H200’ 대(對)중국 수출에도 복병으로 작용했다. 16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국 하원 미중전략경쟁특별위원회의 존 물레나(공화·미시간) 위원장은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AI 가속기에 필수적인 D램의 부족은 새로운 수출 승인의 즉각적인 도전”이라고 주장했다. 물레나 의원은 서한에서 “심각한 공급 제약 때문에 HBM3E(5세대 고대역폭메모리)가 탑재된 칩을 중국에 보내면 미국 고객들에게는 이것이 기회비용의 상실이 된다”고 지적했다. 물레나 의원은 그러면서 러트닉 장관에게 이번 달 25일까지 미중전략경쟁특별위에 관련 설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14일 미국으로 수입됐다가 다른 나라로 재수출되는 반도체에 대해 25%의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의 포고문에 서명하면서 엔비디아의 H200 대중국 수출을 사실상 공식화했다. H200은 미국이 기존에 중국 수출을 허용했던 ‘H20’보다는 성능이 압도적으로 우월하고, 최첨단 칩인 ‘블랙웰’ ‘루빈’보다는 사양이 낮은 제품이다. 반면 중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4월 방중할 때까지 협상 카드로 쓰기 위해 H200 반입을 제한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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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비메모리 전부 美 40% 목표···인건비·소부장 부담 너무 크지만 안보가 걸림돌
한국 입장에서 우려되는 부분은 트럼프 행정부가 아시아권에 쏠린 비메모리·메모리반도체 생태계를 미국으로 옮길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상무부는 15일 2500억 달러 직접 투자, 2500억 달러 정부 신용보증 등을 조건으로 대만에 대한 관세율을 20%에서 15%로 낮추기로 했다. 특히 대만 기업이 미국에 공장을 짓는 동안에는 생산량의 2.5배, 완공한 뒤에는 1.5배에 달하는 물량을 무관세로 처리하기로 해 사실상 한국 기업들의 추가 투자를 유도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 애리조나주에 반도체 공장 6곳을 완공·증설하기로 한 TSMC는 이번 무역협정으로 공장 5곳을 더 짓기로 했다.
러트닉 장관은 마이크론 뉴욕주 공장 착공식 직후 CNBC 인터뷰에서 “대만의 투자 규모는 직접 투자와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 보증까지 합쳐 총 5000억 달러”라며 “TSMC가 애리조나주 인근 땅을 방금 매입했고 미국 생산 규모는 두 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트닉 장관은 이어 “수백 개 기업과 함께 대만 전체 반도체 공급망과 생산량의 40%를 미국으로 가져오는 게 목표”라며 “만약 그들이 미국에 공장을 건설하지 않으면 관세는 100%가 될 가능성이 크고 이는 당근이 아닌 채찍”이라고 주장했다. 장기적으로 마이크론을 통해 D램과 HBM 시장의 40%를 차지하고, TSMC 등 대만의 비메모리반도체 시설도 40%를 미국으로 들이겠다는 의미였다. 또 미국으로 옮기지 않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한국 공장 물량에는 100% 관세를 매겨 차별화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8월 조 바이든 전 행정부가 약속한 보조금으로 경영난에 빠진 인텔의 지분 9.9%를 사들여 직접 최대주주 자리에 올랐다.
국내 업계 관계자들은 미국의 요구는 무리수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높은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반도체 관련 소재·부품·장비도 일본과 대만 쪽에 집중돼 있어 마이크론조차 미국 내에서는 경쟁력을 갖추기 힘들 것이라는 게 국내 반도체 업계의 생각이다. 한국은 지난해 11월 한미 관세 협상 때 대만보다 불리하지 않은 무역 조건을 적용받기로 약속한 뒤로 ‘반도체 최혜국 대우’만 믿다가 발등을 찍혔다. 17일 대만중앙통신 등 중화권 매체도 러트닉 장관의 발언이 현실화될 경우 대만의 반도체 산업 자체가 공동화될 수 있다고 한목소리로 우려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자국 기업인 애플에도 “인도가 아니라 미국에서 아이폰을 제조하라”고 거듭 촉구했고, 애플은 결국 같은 해 8월 6일 백악관에서 미국 내에 4년간 1000억 달러(약 147조 원) 규모를 추가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해야 했다.
그럼에도 한국과 대만이 미국의 압박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은 바로 안보 문제다. 대만이 관세율을 고작 5%포인트 깎는 대가로 5000억 달러에 달하는 투자를 약속하고 TSMC 시설의 상당 부분을 이전하겠다고 공언한 것도 미국의 안보 보장을 신경 쓴 까닭으로 읽힌다. 대만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3연임 마지막 해인 내년, 자신의 4연임을 위해 자국을 침공할 수도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북핵 문제를 떠안고 있는 한국도 안보 문제에서 예외일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도 겉으로는 거래의 명분으로 관세를 내세우면서도 미국의 안보 우산을 염려하는 동맹국들의 심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한국·대만과 반도체 투자 문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그린란드 병합 문제 등이 모두 같은 맥락으로 엮였다. 이는 미국의 안보 지원에서 자유로운 중국, 러시아 등이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에도 외려 자유로운 대응으로 일관하는 이유다.
반도체 관세가 화두가 되면서 당분간 이 사안이 미국과 한국, 대만 증시에도 영향을 주게 됐다. 마이크론은 가장 최근 거래일인 16일 나스닥종합지수가 0.06% 하락한 가운데서도 홀로 7.76% 급등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마이크론에 공장을 넘길 가능성이 높은 대만의 PSMC도 19일 주가가 9.93%나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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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윤경환 특파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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