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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의 허세와 개념의 비만

메트로신문사 한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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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스웨덴의 한 전시장. 스위스 출신의 개념미술가 로만 시그너(Roman Signer)는 모래를 채운 붉은색 플라스틱 양동이 열 개를 수직으로 쌓아 올린 뒤, 맨 아래 양동이에 작은 구멍을 냈다. 구멍 사이로 가느다란 모래가 흘러나오자 지지력을 잃은 양동이 탑은 서서히 기울었고, 이내 힘없이 무너졌다. 작가는 이 과정을 '시간적 조각', '액션 조각'이라 명명했다.

양동이는 물리 법칙에 따라 쓰러졌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관람객들은 일시성과 유동성을 통한 예술의 본질 운운하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비평가들은 '시간의 비가역성', '엔트로피 법칙에 따른 질서의 붕괴'와 같은 거창한 수식어를 갖다 붙였다. 그러자 일개 자연현상은 고도의 사유로 둔갑했고 자칭 '세련된 뻘짓'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거장의 개념으로 격상되었다.

모래 양동이 사례는 오늘날 미술이 고질적으로 앓고 있는 '개념의 비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품이 제공하는 미적, 실질적 경험은 극도로 축소된 반면 그것을 둘러싼 해석의 몸집만은 과도하게 팽창한 상태를 말함이다.

예술은 때로 '형이상학적 허세'로까지 나아가곤 한다. 2021년, 이탈리아 작가 살바토레 가라우(Salvatore Garau)는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투명한 조각'을 우리 돈 2천여만 원에 판매했다. 그는 이 보이지 않는 조각(바닥에 테이프로 표시된 빈 사각형 구역)이 진공 상태의 공기와 영혼으로 만들어졌으며, 물질성을 제거함으로써 순수한 개념만 남았다고 주장했다.

이 작업이 눈에 띄는 건 예술을 감각과 경험의 영역에서 떼어내어 '믿음'의 문제로 이동시켰다는 것이다. 예술은 이제 비평과 판단의 영역에서 벗어나 신앙의 대상으로 올라섰다. 믿는 자에게만 의미가 있고 믿는 자의 눈에만 보인다.

일부 비평가들이 가라우의 작업을 '고도의 지적 실험'으로 옹호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우스꽝스러운 말장난이며 과거 이브 클라인(Yves Klein) 등의 선배 작업을 답습한 극단적 촌극이라 평가 절하했다. 나아가, 허풍과 허세 가득한 작업들이 예술로 통용될 수 있는 구조 자체를 먼저 봐야한다는 목소리도 뒤따랐다.


사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이미 오래 전 의미 없음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기들만의 리그를 만들어가는 현대미술의 구조를 '예술의 음모(The Conspiracy of Art)'라 했다. 여기서 음모란 미술시장, 미술관, 비평, 학계가 야합해 아무 가치 없는 것들을 고귀한 예술로 승격시키는 네트워크다. 이 구조 안에서는 그것이 어떤 제도 안에 편입되었는지가 우선한다. 작품의 질이나 밀도가 아니다.

과거의 예술은 형식적 완성도, 미적 경험의 밀도, 감각적 설득력이라는 내재적 기준을 통해 평가되었다. 그러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이후, 이러한 기준들은 급속히 '낡은 미학'으로 밀려났다. 대신 그 자리를 개념과 맥락(context), 그리고 제도적 승인 여부가 대체했다. 문제는 이 전환이 선택지가 아니라 당위처럼 작동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술이 반드시 물리적 실체를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작가의 선언과 제도의 수용만으로도 성립할 수 있다는 관점 자체는 부정할 수 없으며, 실제로 동시대미술을 지탱하는 중요한 토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잣대가 되는 순간, 예술은 스스로를 비평 불가능한 영역으로 밀어 올린다. 특히 제도가 모든 것을 예술로 승인할 수 있다면, 제도 자체의 정당성은 어디서 나오는가는 오늘의 미술이 진지하게 짚어 봐야할 자문이다. 구조가 자기검증의 메커니즘을 상실했다면 더욱 그렇다.■홍경한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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