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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보 금융의 한계, 모험자본이 메워야 할 자리 [생산적 금융의 조건]

쿠키뉴스 임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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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자본 공급, 자본시장이 주도해야”
“단기 조달 구조 바꾸고 리스크 관리해야”
“심사역량 강화 ·회수시장 활성화 절실”
“중소형 증권사 참여 유도…세제 혜택, 자금 유인 가능”
정부는 올해를 ‘생산적 금융 원년’으로 선언하며 금융자금의 흐름을 비생산적 영역에서 생산적 영역으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저성장이 고착화된 한국 경제에서 금융의 역할이 다시 질문받는 배경이다. 그동안 금융 공급은 담보와 신용을 기준으로 부동산과 가계대출에 집중돼 왔고, 혁신기업과 성장 초기 산업으로의 자금 유입은 제한적이었다. 본지는 생산적 금융이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살펴봤다. 돈을 굴려 돈을 버는 금융을 넘어, 기업과 산업을 키우는 금융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 짚어본다. [편집자주]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국내 금융 구조의 한계는 이미 여러 차례 확인됐다. 담보와 신용도를 중시하는 구조에서는 혁신기업과 성장 초기 기업으로 자금이 흘러가기 어렵고, 금융자금의 방향을 비생산적 영역에서 생산적 영역으로 돌리는 데에도 제약이 따른다. 이재명 정부가 이러한 문제의 해법으로 ‘생산적 금융’을 제시하면서 자본시장의 역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대출이 아닌 투자, 특히 실패 가능성을 전제로 한 모험자본 공급은 은행보다 자본시장이 강점을 지닌 영역이다. 이 때문에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벤처캐피탈(VC) 등이 생산적 금융의 핵심 플레이어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다만 금융투자업계가 단기 수익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나 모험자본 공급 플랫폼으로 전환하려면, 자금조달 방식부터 투자 판단, 회수 구조까지 금융의 작동 방식 전반을 함께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모험자본 공급, 자본시장 역할 중요”

‘생산적 금융’의 핵심은 모험자본 공급으로 평가된다. 부동산과 예금에 묶여 있던 시중 자금을 혁신기업과 첨단산업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담보대출이 아닌 모험자본 공급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에서다. 모험자본은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위험이 있지만 성공할 경우 평균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낼 가능성은 높은 사업에 공급하는 자금을 말한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선 생산적 금융의 핵심 축을 자본시장으로 지목했다. 그러면서 “시중 유동성이 부동산에 묶여 있는 한 성장잠재력은 한계에 부딪힌다”며 “증권사와 자산운용사가 혁신벤처와 첨단기술 산업에 모험자본을 대규모 공급하는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와의 격차도 뚜렷하다. 그는 “미국 투자은행(IB)들은 혁신 벤처기업 투자, 스케일업에 대한 모험자본 공급, 인수합병(M&A) 자문 등을 통해 경제 혁신 성장을 이끌어왔다”고 짚었다. 반면 국내 증권업계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보증과 주가연계증권(ELS) 판매에 역량을 집중하며 단기 실적 위주의 경영 관행이 고착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지난 2024년 기준 종합금융투자회사(종투사)의 IB 수익 중 부동산 PF 채무보증 비중은 48%까지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NH투자증권 리서치센터에 따르면 같은 기간 미국 등 주요국과 비교한 국내 신성장 분야 투자 격차도 최근 5년간 꾸준히 벌어지는 추세다.

이준서 동국대 교수는 “금융이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중개자 역할에 머물면 생산적 금융은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지했다.

“단기 조달 구조 바꾸고 리스크 관리해야”

정부 주도로 시장 환경 변화를 향한 물꼬는 이미 트였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초대형 IB 5곳이 향후 3년간 20조3000억원 규모의 모험자본을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이 가운데 신규 공급분 15조2000억원이 혁신산업과 벤처 분야에 투입되며, 이 중 약 26.7%는 ‘국민성장펀드’를 통해 집행될 예정이다

이 연구위원은 “대형 IB들이 국민성장펀드를 중심으로 새로운 성장형 자금공급 모델을 만들어가면 자본시장 주도형 생산적 금융 전환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국내 증권사들의 자금조달 구조는 여전히 단기 중심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금융연구원이 발간한 ‘국내 증권사 자금조달 문제점과 개선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증권사 자금조달에서 만기 1년 미만 단기 비중은 평균 86.2%로 10년 전 대비 11%p 급증했다. 자기자본 3조원 이상 대형사의 경우 지난 2014년 74.3%에서 2024년 85.8%로 11.5%p 늘었다. 이 연구위원은 “발행어음과 종합투자계좌(IMA) 상품을 다변화해 자금조달 구조를 단기 중심에서 단기·중기·장기 구조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수신금리 경쟁이 과열될 경우 고위험 자산 투자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체계적인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도 제기된다. 그는 “IMA, 발행어음 판매 과정에서 과도하게 높은 이자를 약속하면 조달 자금을 위험도가 높은 자산에 투자할 수밖에 없어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며 “만기 불일치 가능성에도 노출될 수 있는 만큼 유동성 리스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심사역량 강화·회수시장 활성화 절실”

자본조달 구조만 바꾼다고 생산적 금융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생산적 금융으로 향한 자금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해 성과를 내느냐는 더 근본적인 문제다. 숨은 ‘진주’를 가려내는 심사 역량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이준서 교수는 “모험자본은 본질적으로 실패 확률이 높다. 그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생산적 금융은 작동할 수 없다”며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아이돌 육성 전략과 비슷하다. 10개 팀 중 9개 팀이 실패해도 1개 팀의 성공이 나머지 실패를 모두 보전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른바 ‘1대9의 법칙’으로, 종전의 보수적인 투자 관행만으로는 생산적 금융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는 ‘하이브리드 심사모델’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이 교수는 “VC의 사업성 평가 방식과 기존 금융회사들의 여신심사를 결합해야 한다”며 “과거 부동산 담보 중심 심사에서 벗어나 미래 성장성과 기술 경쟁력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술과 방법론으로 진화해야 하는 때”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국내 금융지주들은 그룹 내에 은행·증권·VC를 모두 보유하고 있어, 정보를 연계하면 글로벌 수준의 기업 분석이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생산적 금융 성공의 마지막 퍼즐은 ‘회수시장’이다. 이 교수는 “현재 국내 회수시장은 IPO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어, 사실상 다양한 회수 경로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면서 “기업공개(IPO) 외에는 자금 회수 수단이 없어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출자자(LP)나 펀드 지분을 사고팔 수 있는 세컨더리 마켓 전용 플랫폼과 한국장외주식시장(K-OTC) 활성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투자에 성공한 자금이 다시 혁신기업으로 흘러 들어가는 구조를 만들려면 회수 채널이 다양해져야 한다는 의미다.

이효섭 연구위원은 “자본시장으로 이동한 자금을 생산성이 높은 분야에 대규모·장기 모험자본으로 투입하면 한국 첨단산업 경쟁력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며 “혁신 벤처기업 탄생과 일자리 확대, 유니콘 증가를 통해 한국이 AI·반도체·양자·재생에너지·블록체인 등 글로벌 혁신 산업의 주도권을 확보할 여지도 커진다”고 내다봤다.

“중소형 증권사 참여 유도 필요…근본적 체질 변화 필요”

중소형 증권사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도 생산적 금융 전환의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이효섭 연구위원은 “중기특화 증권사에 우대금리 적용 등 실질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해 대형사 중심 자금공급 구조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제 개선도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세제 개선과 관련해 그는 “증권거래세와 법인세 부담이 여전히 높고 장기투자 인센티브가 부족하다”며 “일본의 소액투자비과세제도(NISA) 사례를 벤치마크해 ISA 가입 대상, 최대 가입금액 및 인센티브 확대를 검토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세제 혜택은 체질 개선을 돕는 ‘촉매제’일 뿐 근본 대책은 아니라는 데에는 의견이 모인다. 이 교수는 “세금은 꼬리일 뿐 몸통이 될 수는 없다”며 “세제 혜택이나 단기 인센티브는 보조 장치일 뿐이고, 심사 역량과 회수시장 같은 구조적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생산적 금융을 특정 정부의 정책 브랜드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도 나왔다. 이 교수는 “생산적금융은 금융의 체질을 바꾸는 문제”라며 “돈을 굴려 돈을 버는 금융이 아니라, 돈을 굴려 기업과 경제를 키우는 금융으로 전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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