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논설위원 |
공직자들의 사명감을 강조한 말이지만 대통령의 이 발언 속에 노동 개혁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이 몰릴 때는 제대로 하고, 이후에 충분한 휴식이나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근로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 공직과 민간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공직은 국민을 위해 무한 봉사해야 하는 성직이고, 민간 기업은 받은 만큼만 해주면 되는 싸늘한 계약관계로 나눌 순 없다.
‘전쟁’ 중에도 땡 하면 퇴근하는 韓
“불났는데 퇴근이 어디 있냐”는 자세는 민간 기업에도 꼭 필요하다. 1999년 대만을 강타한 ‘9·21 대지진’ 당시 TSMC 공장이 있던 신주과학단지는 들어가려는 차로 길이 막혔다. 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공장 복구를 위해 달려간 것이다. 공장이 장기간 멈출 것이란 우려가 컸지만 2주 만에 정상 가동됐고, 고객사들의 신뢰를 굳혔다. 망설임 없이 회사로 달려가는 문화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업에 대한 사명감, 그리고 자신의 헌신이 보상받을 것이란 믿음이 쌓였기에 가능했다.
한국 기업에선 이런 모습을 찾기 힘들다.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우리 ‘군인’들은 시계를 보다가 땡 하면 총을 내려놓는다.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획일적인 주 52시간 규제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연구개발(R&D) 분야만이라도 예외를 허용해달라는 호소는 대답 없는 메아리로 남았다. 3교대로 24시간 불을 밝히는 TSMC의 ‘나이트호크 프로젝트’나 007(24시간, 7일) 근무를 불사하는 중국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근로시간 규제의 예외를 폭넓게 인정하는 다른 선진국들만큼이라도 할 순 없는 걸까.
이 대통령도 경직된 근로시간의 문제점과 고용 유연성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한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인 지난해 2월 토론회에서 “특정 산업의 연구개발 분야 고소득 전문가들이 동의할 경우 예외로 몰아서 일하게 해주자는 게 왜 안 되냐고 하니 (나도) 할 말이 없더라”라고 했다. 지난해 10월 유연근무 확대를 요구하는 게임업계에 “탄력적인 노동시간 운영에는 양면이 있다”며 지혜로운 해결을 주문했다. 하지만 주 52시간 규제를 무력화할 것이라는 양대 노총 등 노동계의 반발에 이후 논의는 쑥 들어갔다.
제대로 일하고 보상받는 게 노동개혁
물론 근로시간 개편에는 충분한 휴식이나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지난 정부가 추진했던 근로시간 개편은 ‘주 69시간 근로’ 프레임에 걸려 좌절됐는데, 노사관계에 대한 근본적 불신이 한몫했다. 지금도 포괄임금제에 묶여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있는데 ‘공짜 야근’이 더 늘어날 것이란 우려가 컸다. 건강권 보호를 내세워 근로시간 개편 논의를 아예 봉쇄하기보다는 함께 머리를 맞대 효율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
현 정부의 노동 개혁은 ‘시간’에 매몰돼 있다. 2030년까지 실근로시간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연 1700시간대로 단축하는 게 목표다. 하지만 근로시간 단축은 목표가 아닌 생산성 높은 방식으로 일한 결과여야 한다. 업무의 밀도와 효율성을 높이는 쪽으로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 근무 시간만 채우면 포인트 쌓듯 해마다 연봉이 높아지는 호봉제 대신 성과 중심의 평가와 보상체계를 확대해야 한다. 일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해야 일이 굴러가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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