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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니즘과 저널리즘 [저널리즘책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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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장남의 음주운전 기사 삭제·수정 사태를 다룬 12월31일치 미디어오늘 1면 기사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장남의 음주운전 기사 삭제·수정 사태를 다룬 12월31일치 미디어오늘 1면 기사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



일주일 전, 서수민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쓴 ‘시민편집인의 눈’ 칼럼이 오피니언면에 실렸다. ‘현대차 장남 기사 수정 사건이 던지는 질문들’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한겨레 편집과 경영을 분리하는 울타리에 구멍이 난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진단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최근 언론계는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장남의 음주운전 사건 기사 삭제 사태로 큰 홍역을 치렀다. 언론사 자체 조사 등을 통해 10여곳의 언론사가 현대차 쪽의 요청을 받고 기사를 삭제하거나 제목 등을 수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안타깝게도 문제의 언론사 명단에 한겨레도 포함돼 있었다.



한겨레는 원래 ‘정의선 현대차 회장 장남 면허취소 수준 음주운전 뒤늦게 드러나’로 되어 있던 기사 제목을 ‘현대차 회장 자녀 면허취소 수준 음주운전 뒤늦게 드러나’로 바꿨다. 제목에서 ‘정의선’과 ‘장남’을 지운 것이다. 현대차 쪽의 요청이 광고 담당 임원과 편집인을 거쳐 뉴스룸국장에게 전달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한겨레 내부에선 즉각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연차 기자들을 중심으로 책임자 사퇴 등을 요구하는 기수별 릴레이 성명이 줄을 이었다. 이들은 제목 수정 사태를 ‘편집권 침해’로 규정했다. 선배들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결국 광고 담당 임원과 편집인, 뉴스룸국장 등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표이사도 사퇴 의사를 밝혔다.



물론 ‘이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실제 이 소식을 접한 회사 밖 지인 가운데 일부는 문자 등을 통해 그런 우려를 전했다. 그들에게 이렇게 답해줬다. “한겨레니까 문제가 되는 거다.”



한겨레는 창간 당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창간 발기인들이 시민 모금으로 자본금을 마련하는 ‘국민주 신문’을 구상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창간 주역들의 다짐은 단지 선언에 그치지 않았다. 창간과 동시에 국내 언론 최초로 제정한 윤리강령에 이를 못박아놓았다.



“정치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은 한겨레신문의 움직일 수 없는 원칙이다.”(언론자유의 수호)



“우리는 광고주나 특정 이익단체의 청탁이나 압력을 배제한다.”(사실과 진실보도의 책임)



한겨레 사규의 하나인 ‘편집 규정’에는 ‘회사는 경영상의 문제로 인해 편집권 독립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취재보도준칙에도 비록 선언적 규정이긴 하지만 ‘우리는 어떤 권력으로부터도 독립하여 언론의 자유를 지킨다’는 다짐이 담겨 있다.



이렇게 이중 삼중의 벽을 세워놓았음에도 잊을 만하면 광고 영업과 관련된 편집권 훼손 논란이 불거졌다. 광고주 요청으로 해당 기업 비판 기사의 포털 전송을 누락하거나 재벌을 비판하는 내용의 노동계 의견 광고 게재를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겨레가 앞장서 비판했던 정책을 홍보하는 정부 광고를 실어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한겨레 구성원들은 그때마다 성명서를 내놓으며 ‘먹고사니즘과의 타협’을 비판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언론의 광고 의존도는 매우 높다. 특히 4대 재벌 그룹 광고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자본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천명하고 재벌의 그릇된 행태를 비판해온 한겨레의 딜레마는 이런 현실에서 비롯된다. 재벌을 매섭게 비판하면서 매출의 상당 부분을 대기업 광고에 의존하는 상황이 창간 이후 40년 가까이 이어져온 결과다. 비판적인 보도를 이유로 삼성그룹 광고가 장기간 끊기는 일도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겨레 내부엔 늘 편집과 경영 사이에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됐다. 혼탁한 미디어 시장에서 한겨레 조직이 아직은 건강하다는 방증으로 보는 평가도 있지만, 매출 실적 부담 등으로 인해 긴장관계가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언제든 ‘사고’가 날 수 있는 취약한 구조라는 점도 분명했다. 이번 현대차 제목 수정 사태가 그 예다.



한겨레도 자본주의 시장에서 생존해야 하는 기업이므로 경영을 책임지는 임원들이 느끼는 중압감은 매우 클 것이다. 종이신문의 위상이 하루가 다르게 쪼그라드는 미디어 환경에서 저널리즘 원칙을 올곧이 지키는 동시에 생존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수준의 매출을 올리는 일은 녹록지 않은 과제다. 그러나 편집과 경영의 분리는 한겨레가 ‘한겨레답게’ 살아남기 위한 마지노선이다. 자본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천명한 한겨레의 숙명이자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언론 시장의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건실한 저널리즘을 지속할 수 있는 수익구조에 대한 실질적 논의는 이뤄지지 못한 채 기사 수정이라는 쉬운 길을 택한 점에 대해서도 뼈아픈 자문이 필요하다”는 한겨레 젊은 기자들의 문제의식은 타당하다.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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