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설립 추진하는 평화위원회가 전후 가자지구 통치 감독을 넘어 ‘국제 분쟁 해결 기구’를 자처하고 나서면서 유엔 중심의 다자주의 체계를 위협하는 ‘트럼프판 유엔’이 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 60여개국을 상대로 초청장을 보내면서 10억달러(약 1조4725억원)을 내는 국가는 종신 이사직을 맡을 수 있다고 밝혔다. 친트럼프 성향의 일부 국가를 제외한 각국 정상들은 신중한 반응을 내놓고 있다.
19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 60여개국을 상대로 평화위원회 구성을 위한 초청장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외신에 공개된 이사회 정관 초안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평화위원회 종신 의장을 맡게 된다. 회원국 임기는 3년이며, 10억달러 이상의 현금을 낼 경우 영구 회원국 자격을 얻게 된다.
지난해 10월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하고 다음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지지를 결의한 가자지구 평화구상에서 평화위원회는 가자지구 재건과 통치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정작 공개된 이사회 정관에는 가자지구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정관에 따르면 이사회 임무는 “분쟁의 영향을 받거나 위협받는 지역에서 안정을 증진하고, 신뢰할 수 있고 합법적 통치를 회복하며, 지속적 평화를 회복하는 것”과 “국제법에 따라 평화 구축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명시돼 있다.
지난 17일(현지시간) 가자지구 북부 자발리아 난민 캠프에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주택과 상점 잔해 사이로 피란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AFP연합뉴스 |
이를 두고 유엔 등 국제기구에 회의적인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 안보리를 대체할 미국 주도 기구를 만들려고 한다는 추측이 제기됐다. 평화위원회 헌장 초안에는 “더 민첩하고 효과적인 국제 평화 구축 기구가 필요하다”며 “지속적 평화는 실용적 판단과 상식적 해결, 너무 자주 실패해 온 접근 방식 및 기관으로부터 벗어날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한 외교관은 “이것은 유엔 헌장 근간을 무시하는 ‘트럼프판 유엔’”이라고 로이터에 말했다. 다른 서방 외교관들도 이 계획이 실현될 경우 유엔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유엔은 겉으로는 표정 관리에 나서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우려를 내비쳤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평화위원회에 관한 질문에 “회원국들은 다양한 그룹에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서도 “유엔은 부여된 임무를 계속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엔 고위 관계자는 “유엔만이 전 세계의 크고 작은 모든 나라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도덕적·법적 능력을 갖춘 유일한 기관”이라고 로이터에 말했다.
안날레나 베어복 유엔총회 의장은 스카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우리가 유엔의 역할을 의심한다면, 매우 어두운 시대로 퇴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난해 9월 2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 청사 위로 유엔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게티이미지 |
현재까지 친트럼프 성향의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 또 럼 베트남 공산당 총서기가 참여 의사를 밝혔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남미의 트럼프’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도 동참 가능성을 내비쳤다.
한편 유럽 대부분 국가들은 명시적 언급을 피하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유럽 주요국들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이탈리아는 우리의 역할을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으나, 가자지구 재건에 국한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가자지구를 위한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위원회 구상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세부사항은 조율 중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평화위원회 실권을 쥐고 통제하는 상황에서 유럽 주요국들이 참여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낮아 보인다. 평화위원회는 다수결로 결정을 내리며 회원국들은 각 1표씩 행사할 수 있지만, 종신직 의장을 맡은 트럼프 대통령이 최종 권한을 갖는다.
워싱턴포스트는 유럽 고위 관료를 인용, 유럽 지도자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린란드 문제로 트럼프 대통령과 대립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에서 유럽 지도자들이 또 다른 갈등을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전직 외교관으로 미 행정부에 중동 문제에 대해 자문해 온 애런 데이비드 밀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 외교이지, 보여주기식 위원회 구성이 아니”라며 “대부분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월 취임 이후 파리 기후변화 협정, 세계보건기구(WHO), 유네스코 등 국제기구에서 탈퇴했으며, 최근 66개 기구에서 무더기로 탈퇴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은 유엔 정규 예산의 22%를 부담하지만, 현재 15억달러(약 2조2108억원)이 체납된 상태라고 로이터는 전했다.
☞ 가자지구 집행위 구성도 난항···네타냐후 “이스라엘 정책과 상반” 비판
https://www.khan.co.kr/article/202601181552001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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