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 AFP 연합뉴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그린란드를 차지하기 위해 관세로 유럽을 압박하자, 유럽은 보복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930억유로(약 160조원)짜리 관세 폭탄, 이른바 ‘바주카포’ 무역제재 등이 거론된다. 미국에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던 나라들과 각국 산업계도 강경 대응을 주장하는 등 이전과 달라진 분위기다.
르피가로·가디언에 따르면, 영국·프랑스·독일·덴마크·네덜란드·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 등 유럽 8개 나라는 18일(현지시각) 공동성명을 내어 “(미국의) 관세 위협은 대서양 동맹 관계를 훼손하고 위험한 악화 국면을 초래한다. 유럽은 단결해 조율된 대응을 할 것이며, 우리 주권을 방어하는 데 전념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들 나라가 최근 그린란드에서 벌인 군사훈련을 문제삼아 다음달부터 10%, 6월부터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통보한 데 대한 항의다. 전날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유럽이 “알수 없는 목적으로” 그린란드에 군을 보냈고, “지속 불가능한 수준의 위험을 초래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공동성명은 그린란드 군사 훈련은 “나토(NATO) 동맹국으로서” 수행한 것이며,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성명과 별개로 유럽연합(EU) 주재 27개 회원국 대사들은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긴급 비공개 회의를 열어 대응책을 논의했다. 대사들은 미국이 실제로 관세를 부과하는 상황에 대비해 보복 조처를 준비하자고 합의하고, 실제로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럽연합은 오는 22일 긴급 정상회의를 열어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유럽연합은 우선 ‘맞불 관세’ 카드를 검토 중이라고 가디언은 전했다. 지난해 유럽연합이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세 전쟁에서 마련한 930억유로 규모의 보복 관세 패키지를 다시 꺼내든다는 얘기다. 이 패키지는 미국산 자동차, 산업재, 식음료 등에 추가 관세를 매긴다. 지난해 7월 유럽산 제품의 미국 수입 시 관세율을 15%로 하는 내용의 협정이 체결되며 2월6일까지 도입이 유예된 상태다. 미국발 관세 전쟁이 재차 현실화되면 유럽이 이를 되살릴 수 있다.
덴마크군이 18일 그린란드 설원에서 실탄을 사용한 훈련을 벌이는 모습. UPI 연합뉴스 |
최고 수위의 무역 방어 수단인 ‘통상위협대응조치’(ACI)로 맞서자는 요구도 나온다. 르피가로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측근들을 인용해, 그가 이날 “하루 종일 유럽 정상들에게 연락을 걸어” 이 조치 발동을 촉구했다고 전했다.
통상위협대응조치는 유럽연합 회원국에 ‘경제적 강압’을 가하는 나라의 수입을 제한하거나, 공공조달 시장 접근이나 투자를 차단하고, 특허를 중단한다는 내용이다. 지난 2023년 중국과의 무역 분쟁에 대비해 마련됐지만 아직 시행된 적은 없다. 지난해 관세 전쟁 때 마크롱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이 조치를 가하자고 주장했지만, 독일·이탈리아 등이 반대하며 무산됐다.
반면 이번에는 독일의 태도가 비교적 강경해졌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의 측근은 르몽드에 “통상위협대응조치를 검토할 준비가 돼 있다”고 확인했다. 독일이 미군의 자국 군사기지 사용료를 대폭 인상하는 방법도 거론된다고 영국 텔레그래프는 보도했다. 미군은 나토 동맹인 유럽 국가 기지를 아프리카·중동 지역 작전의 발진 기지로 쓰고 있다.
이런 변화엔 ‘추가 관세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산업계 요구도 깔려있다. 미 국제 무역청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독일의 대미 수출액은 1600억달러로 영국(680억달러)·프랑스(600억달러)의 갑절이 넘었다. 기존 15% 대미 관세율은 기업들이 감당할 수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 주장대로 여기에 최대 25%가 더 얹히면 미국 수출길이 사실상 막힌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독일 공작기계·산업장비협회(VDMA)는 이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통상위협대응조치 사용 검토를 공개 요청했다. 독일 수출기업협회(BGA)는 “관세가 정치적 무기가 되도록 놓아두면 결국 모두가 패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른 나라에서도 태도 변화가 감지된다. 친트럼프 노선의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이날 방한 중 서울에서 “(미국의) 새로운 제재 부과는 실수”라며 “몇시간 전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해 내 생각을 말했다”고 전했다. 대미 무역을 중시해온 네덜란드의 다비트 판베일 외교장관 역시 미국의 새 관세는 “협박”이라고 규정했다.
다만 유럽이 초강경책을 실제로 밀어붙일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나온다. 여전히 미국 눈치를 보는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있어 ‘단일 대오’가 짜일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국경에서 가까운 북·동유럽의 발트3국(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와 루마니아 등은 미국의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이 끊길 것을 염려해 그린란드 문제에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유럽연합 이사회가 통상위협대응조치를 의결하려면, 전체 인구 65% 이상에 해당하는 회원국의 동의가 필요하다.
합의에 이르더라도 곧장 이 제재가 발동하는 건 아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미국이 경제적 강압을 철회하도록 협상에 들어가고, 합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면 통상위협대응조치 중 일부 또는 전부를 시행하게 된다.
유럽 정상들은 19∼23일 스위스에서 열릴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 일정 중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이때 보일 태도가 유럽이 강경 대응에 나설지 여부에 대한 가늠자가 될 거라고 르몽드는 짚었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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