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 밀짚 더미, 여름의 끝 무렵, 1890~91, 캔버스에 유채, 60x100.5cm, 시카고 미술관 |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밀집 더미, 여름의 끝 무렵>을 한 점 만 본다면 그리 특별할 게 없는 풍경화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모네의 최고 연작 중 하나다. 모네는 1890년부터 1891년까지 밀짚 더미 30여점을 그렸다. 마침 시카고 미술관에서 모네의 밀짚 더미 6점을 발견하곤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오르세도 메트로폴리탄도 보스턴 미술관도 한 점 밖에 소장 하지 못한 귀한 작품이다.
모스크바에서 법학과 경제학 학위를 받고 대학교수가 된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1896년 모네의 전시회에서 밀집 더미 연작을 보았다.
그러나 그 그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 없었던 칸딘스키는 그날 밤 밀집 더미가 눈앞에 어른거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칸딘스키는 형태가 없이 색채의 조합과 붓터치만으로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었다. 어린 시절부터 개인교습을 받던 30살의 칸딘스키는 다시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뮌헨으로 떠났다.
클로드 모네, 밀짚 더미(하루의 끝, 가을), 1890~91, 캔버스에 유채, 65.8 ×101cm, 시카고 미술관 |
모네가 1883 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프랑스 지베르니에 있는 그의 집 농가 문 바로 밖에는 높이 4.5~6미터 높이로 수확한 밀더미가 있었다. 처음에는 두 개의 캔버스로 시작했지만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을 담기엔 역부족이라 여러 개의 캔버스가 필요했다. 모네는 햇빛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색을 빨리 고정시키기 위해 집에서 밀집 모양을 미리 그려 가기도 했다.
모네는 연작을 그리며, 비평가 귀스타브 제프루와(Gustave Geffroy, 1855~1926)에게 이렇게 썼다.
“저는 여러 가지 효과(밀짚 더미)를 표현하기 위해 애쓰며 매우 열심히 작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겨울에는 해가 너무 빨리 져서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계속 작업할수록 제가 추구하는 것을 구현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클로드 모네, 밀 더미 (해빙, 일몰), 1890~91, 캔버스에 유채, 64.4 × 92.5cm, 시카고 미술관 |
칸딘스키의 일화를 알게 된 이후 그저 그런 평범한 시골 풍경처럼 보이던 모네의 밀집 더미는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최근 논란이 있지만 칸딘스키는 추상화를 처음 시작한 화가로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천재다.
연작은 여러 작품을 함께 놓고 색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모네의 밀짚 더미에서 형태를 제외하고 색만 본다면 칸딘스키의 추상화로 이어지는 다리가 된다. 모네의 밀짚 더미가 칸딘스키의 추상에 대한 영감을 준 것이다.
연작의 새로운 미학은 예술과 인생은 물론, 사회 체제 그리고 철학에까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클로드 모네, 밀짚 더미 (일몰, 눈 효과), 1890~91, 캔버스에 유채, 65.3× 100.4cm, 시카고 미술관 |
모네는 동일한 주제를 여러 시각에서 탐구해야만 자신이 체험한 감각을 진정으로 드러낼 수 있음을 깨달었다. 그의 독창적인 시선은 선택한 대상 위에 드리우는 빛과 공기의 작용으로 규정되었고, 그는 하루의 시간대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그 미묘한 변화를 포착하려 했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인간이 쌓아 올린 밀짚 더미는 모네에게 생존과 삶의 울림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그의 그림이지만, 화가는 매 순간 조건에 맞추어 팔레트와 붓질을 세심하게 조율했다. 늦여름의 풍경뿐 아니라 대부분의 가을 장면에서 밀짚 더미의 뾰족한 꼭대기는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듯하며, 그 뒤로 펼쳐진 지평선과 맞닿아 있다.
클로드 모네, 밀짚 더미 (눈 효과, 흐린 날씨), 1890~91, 캔버스에 유채, 66 × 93cm, 시카고 미술관 |
겨울 풍경 속에서 밀짚 더미는 마치 추위에 몸을 웅크린 듯 들판과 언덕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다. 모네는 스튜디오에서도 연작을 이어갔는데, 처음에는 봄의 장면으로 시작한 작품이 시간이 지나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 겨울의 모습으로 바뀌기도 했다.
클로드 모네, 밀짚 더미, 1890~91, 캔버스에 유채, 65.8 × 92.3cm, 시카고 미술관 |
1891년 5월, 모네는 파리의 뒤랑 뤼엘 갤러리에 이 연작의 캔버스 15점을 작은 방 하나에 나란히 전시했다. 전례 없는 비평적 성공을 가져온 이 전시는 모네의 경력뿐 아니라 프랑스 미술사에도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곧 재정적인 성공으로 이어지며 작품 한 점이 4,000~6,000 프랑까지 올라갔다. 이제 가난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모네가 더 이상 돈 때문에 고통 받을 일은 없었다.
카미유 피사로는 “사람들은 모두 모네만을 원해. 가장 끔찍한 것은 모두가 해질녘의 밀짚 더미만 원한다는 사실이야”라고 했다.
시카고 미술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밀짚 더미> 6점을 소장하고 있다. |
시카고 미술관은 모네 전시회를 처음으로 개최한 미술관이기도 하고, 파리 외 지역에서 모네의 회화와 종이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미국 내 유일한 미술관이다. |
왼쪽은 클로드 모네, 밀짚 더미(눈과 태양의 효과), 1891, 캔버스에 유채, 65.4x 92.1cm, 오른쪽은 클로드 모네, 루앙 대성당: 입구(햇빛), 1894, 캔버스에 유채, 99.7x 65.7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뿌연 안개를 머금은 새벽과 찬란한 태양이 내리쬐는 오후, 석양이 질 때, 빛의 온도가 달라지면서 눈에 보이는 밀집 더미 인상도 바뀐다. 빛은 계절, 시간, 온도, 구도에 따라 매 순간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아침엔 맑고 청량한 빛이 어둠을 밀어내고, 오후엔 강렬한 광채가 선명한 그림자를 만든다. 해가 기울면 붉게 물든 하늘은 사물의 윤곽을 부드럽게 바꾼다.
이 변화들을 정확히 담아내려면 매 순간에 맞는 색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자연의 빛이 캔버스에 옮겨지면 곧 색이 되고, 빛은 형태 자체를 변형한다. 모네의 그림만큼 이 사실을 또렷하게 증명한 사례는 드물다.
그가 회화사에서 유례없는 연작을 남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애초에 15점이 하나의 앙상블로 전시되었지만, 작품들은 각기 다른 소장처로 흩어져 세계 곳곳에 자리하게 되었다. 모네는 밀짚 더미를 통해 자신이 꿈꾸던 빛과 물의 공간을 구축했고, 그 안에서 인상주의의 정수이자 미술사의 찬란한 걸작들을 완성했다.
클로드 모네, 밀짚 더미, 1891년 여름 끝자락,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
추운 노르망디 아침처럼 창백한 녹색과 파란색을 배경으로 밀짚 더미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모네에게 밀짚 더미는 단순한 농촌의 풍경을 넘어 생존과 생활을 상징하는 중요한 존재였다.
클로드 모네, 밀짚 더미(일몰), 약 1891, 캔버스에 유채, 보스턴 미술관 |
모네의 대표작 밀짚 더미는 2019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약 1억1,074만 달러(약 1,318억 원)에 낙찰되며 모네 작품 중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다. 이는 인상주의 회화 사상 최고가 경매 기록이기도 하다.
모네는 경력 중반에 이르러 빛과 기후가 만들어내는 변화 속에서 대상의 본질을 포착하고, 이를 연속적인 이미지로 담아내는 데 몰두했다. 그는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붓을 움직이고, 작업실에서 세밀하게 캔버스를 다듬으며 건초 더미,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의 석조 외관을 단순한 순간의 인상에 그치지 않고 전체 풍경의 조화 속으로 확장시켰다.
그 결과, 그의 붓질은 찰나를 기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영원히 울려 퍼지는 울림을 남겼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네는 템즈 강과 대운하, 노르망디와 지중해의 해안선, 도시의 수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연작을 이어가며 그 범위를 넓혀 갔다. 생애 후반에는 파리 북서쪽 지베르니의 정원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여, 유동적이고 추상에 가까운 표현으로 벽화 크기의 수련 연작을 완성했다.
최금희 작가 |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