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왼쪽)와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 연합뉴스 |
방준호 | 이슈팀장
오늘 아침도 보통의 얼굴로 회사 책상에 앉은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몇번쯤 있었을 것이다. 어느 갑에게 부당한 지시를 부당한 방식으로 받으며 고통과 모욕감에 몸서리친 순간. 저릿한 고통에도 당신의 대답은 “넵 알겠습니다”에 그쳤을 것이다. 말 몇마디를 얹을라치면 괴성에 가까운 “야! 야!”에 이어 “입이라고 그렇게 터졌다고…”로 포문을 여는 더 큰 화가 몰아칠 테니까.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의 과거 국회 인턴 비서관을 향한 폭언 녹취를 듣고 며칠을 심장이 벌렁거렸다.
작명의 명가, 직장갑질119는 ‘우리 회사 이혜훈’으로 이름 붙인 직장 내 폭언 분석 자료를 냈다. 그 녹취가 남 얘기 같지 않아 전율했다고들 하는 심정을 절묘하게 대변해 씁쓸하게 웃었다. 자료 한 대목에 “제보가 끊이지 않았지만, 이혜훈을 능가하는 막말은 매우 드물었다”고, 단체는 그나마 다독였다. 그래도 막말은 막말, 갑질은 갑질이다.
‘네 사모님’, ‘확인하겠습니다 사모님’. 박찬희 기자가 전해 온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의 텔레그램방 ‘920호 소통방’에서도 그 익숙하고 저릿한 대화가 펼쳐졌다. 지시하는 자리에 국회의원 배우자가, ‘넵 알겠습니다’의 자리에 구의원이 있었다. 구의원과 보좌진이 김 의원 가족의 대학 입학과 취업과 직장 업무와 제주 여행과 병원 진료와 경찰 내사와 주변 민원 등을 해결하려 여기저기 뛰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노량진 수산시장 한 상인은 김 의원 눈 밖에 난 상황을 해결해보려 회를 싸 들고 집을 찾았다고 증언했다. ‘전방위 갑질’ 말고 달리 표현하기 어려운 다종다양한 의혹이 활어처럼 펄떡였다.
관습적으로 ‘갑질’, 단어를 적다가 문득 어색했다. 김 의원과 가족, 이혜훈 후보자는 ‘갑’인가. 지방선거에서 ‘시스템 공천’을 천명한 민주당의 국회의원과 구의원 관계가 갑과 을일 순 없다. 심지어 지시는 국회의원 아내와 자녀가 했다. 폭언은 갑에게 허용된 계약상 권한이 아니므로, 녹취된 이혜훈 후보자 발언 또한 갑의 행동으로 볼 수 없다. 그랬다. 애초부터 갑질은 갑이 하는 짓이 아니다. ‘갑이 아닌 이가, 갑이 아닌 순간에 갑인 양 구는 짓’이다.
갑인 양 구는 짓, 이라는 갑질의 본질은 을의 영혼을 상처 입힐 뿐 아니라 갑을의 계약 관계로 얽힌 시스템을 부순다. 갑질이야말로 정상적인 갑을 관계를 무너트리는 첨병인 역설이다. 역시나 갑질은 끝내 부패 스캔들로 이어질 조짐이다. 서울 동작구 전 구의원 2명의 탄원서에는 2020년 총선을 앞두고 김병기 의원 쪽에 불법 정치자금 3천만원을 건넸다는 내용이, 시점과 장소와 맥락까지 구체적으로 적혔다. 부패범죄 혐의라는 차원이 다른 얘기지만, 탄원서 곳곳 갑인 양 구는 이상한 행동과 정황, 불편한 분위기는 ‘우리 회사’에서 당신이 보았던 그 갑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지적 관계에 대한 오해’ 따위 항변이 앞선 강선우 의원 보좌진 갑질 논란 때처럼 일각에서 이어지는 모양이다. 동지는 뜻과 가치, 목적을 함께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국회의원 사생활 곳곳을 챙기는 것이 국민을 대리하고 민주주의와 정당 가치를 수호하는 국회의원 지향과 관련 있을 리 없다. 이들 가치를 위해 쓰여야 할 자원의 유용이므로, 외려 반동이다. 지금 벌어진 이 모든 갑질 논란은 정확히 동지적 관계의 반대라 문제가 됐다.
우리 회사부터 정치 스캔들에 이르기까지 올해도 연초부터 면면히 이어지는 갑질의 연쇄 앞에 유구한 질문도 살짝만 변주해 반복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갑인가.’ 물론 갑도 아닌 주제에 자신을 갑으로 착각할 여지가 큰, 어쩌면 이미 앞선 순간 당신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을지 모를 내 책상 위에부터 잘 보이게 새겨 둬야 할 새해 다짐 중 하나다.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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