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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국부' 이승만 초대 대통령: 유일하게 성공한 비무장 예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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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이 세상에서 정치에 관해 가장 유명한 책은 16세기 초 피렌체의 니꼴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가 쓴 '군주론'이다. 그는 역사가 리비(Livy)가 쓴 136권의 로마 역사책들을 탐독한 후에 정치적 성공을 위한 비방록을 작성하여 당시 메디치 가문의 로렌조 대공(The Magnificent Lorenzo de' Medici)에게 헌정했다. '군주론'은 1527년 마키아벨리가 사망한 5년 후인 1532년에 처음으로 출간됐다. 그 후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관해 불멸의 이름이 되었다. 그 책에서 마키아벨리는 모세나 키로스, 테세우스나 로믈로스같이 무장한 예언자(the armed prophets)는 성공하지만, 비무장 예언자(the unarmed prophet)는 반드시 실패한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오늘날 다시 환생한다면 '군주론'의 수정판을 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20세기 대한민국의 국부 이승만은 비록 철저히 비무장 예언자였지만 그는 새로운 국가 수립과 정치 질서를 아주 성공적으로 이룩했기 때문이다.

청년 이승만은 1904년 8월 9일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 만에 석방되어 대한제국의 보전을 미국 정부에 요청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이승만은 12월에 미국에 도착하여 1905년 1월 11일 미국의 저명한 일간지인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와의 회견에서 일제의 한국 침략을 폭로했다. 그리고 2월 워싱턴 D.C.에 소재한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2학년 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8월 4일 그는 롱아일랜드의 오이시터 베이(Oyster Bay) 해군기지에서 휴양 중이던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예방하고 대한제국의 보전을 요청했다. 이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런 방식은 맞지 않으니 국무성에 가서 호소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일전쟁을 종결하는 러일 간의 포츠머스 평화회담을 주선하고 있었으며 같은 해 7월 29일 이미 태프트-가쓰라 협정(The Taft-Catsura Agreement)을 통해 필리핀의 안전을 대가로 코리아에 대한 관심을 거두기로 동의해 버렸다.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이 체결되고 8월 23일 러일전쟁을 끝내는 포츠머스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의 제2조에서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이 한국에 지배적인 정치·군사, 경제적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일본제국 정부가 한국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형태의 지도, 보호, 감독 조치에 대해서도 이를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이렇게 한국을 외교적으로 완전하게 고립시킨 일본제국은 11월 29일 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세계지도와 국제정치의 무대에서 한국은 이렇게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조국을 사실상 상실했던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한 뒤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과정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1910년 국제법 분야의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프린스턴 대학교 재학 중 그는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총장과 운명적 인연을 맺었다. 윌슨 총장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승만을 '한국 독립의 희망'이라고 소개했다. 1910년 책으로 출간된 이승만의 박사학위의 논문 주제는 '미합중국의 영향력을 통한 중립(Neutrality Through the Influence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었다. 그는 아마도 당시 한때 한국을 유럽에서 벨기에처럼 국제적으로 중립화하자는 주장이 팽배했던 것을 상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은 국제적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어쩌면 미국의 중립 정책을 통해 한국의 통일된 중립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상상해 본다. 물론 이에 대해 이승만이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혹은 간접적으로 그런 의도를 암시한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1913년 이승만의 스승 우드로 윌슨이 미국의 제28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14년 8월 1일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17년 4월 미국이 참전하고 1918년 윌슨 대통령은 평화를 위한 '제14개 조항'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민족자결을 제1차적 원칙으로 하는 완전히 새로운 국제질서의 요구였다. 그는 전통적인 힘의 균형 정책(the balance of power policy)을 거부하고 창설되는 범세계적 평화기구인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통한 집단안보 체제를 제시했다.

이제 국제정치는 모든 국가들에 힘의 경쟁이 아니라 국제연맹 규약의 준수를 요구했다. 환언하면, 이제 국제관계는 국제법과 세계 여론이 주도해야 하는 것으로 변했다. 이런 국제정치의 큰 흐름 속에서 이승만은 우드로 윌슨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즉 이승만은 윌슨주의자가 된 것이다. 이제 그에게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장투쟁이 아니라 세계 여론의 형성이었다. 그는 윌슨 대통령이 주도하는 파리 평화 회담에 참가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로부터 여권이 주어지지 않아 그의 파리행은 좌절됐다.

당시 파리 평화 회담에서 민족자결의 원칙은 패전한 제국들, 즉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오스만 터키 제국의 식민지들에만 적용됐다. 승전국들의 식민지에는 엄격히 적용될 수 없었다. 특히 한국이 관련된 일본제국은 파리 평화 회담에서 국제연맹의 헌장에 '인종의 평등(the equality of race)' 조항을 넣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서구 국가들의 거부에 반발한 일본은 민족자결의 원칙을 위반하면서까지 전쟁 이전에 독일의 조차지였던 중국의 '산동반도'를 일본에 할양(割讓)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것마저 거부된다면 국제연맹의 탈퇴를 불사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윌슨은 국제연맹의 성공적 수립을 위해 일본에 결국 새로운 식민지를 인정했다. 이에 따라 당시 중국의 대표 웰링턴 쿠(Wellington Koo)는 파리 평화 조약의 서명을 거부했다. 반면에 국제연맹의 이사국이 된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지배권을 확대해 나갔다. 1932년 일본이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하자 미국은 불법적 영토의 획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후버-스팀슨 독트린(the Hoover-Stimson Doctrine)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 행동이 뒷받침하지 않은 구두탄(口頭彈) 혹은 립 서비스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본제국은 1937년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했고 1938년에는 마침내 '대동아 공영권(the Great East Asian Sphere for Co-prosperity)'이라는 독립적 영향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팽창하는 시기에 이승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역시 국제연맹과 세계 여론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1932년 초 이승만은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국제연맹의 본부가 있는 스위스의 제네바로 갔다. 이승만은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의 독립 문제를 의제로 채택해 줄 것을 간곡하게 호소했다. 회의장 주변에서 이승만의 호소에 적지 않은 반응이 있었지만, 일본의 강력한 반대로 한국의 독립 문제가 국제연맹 총회의 의제로 채택되지 못했다. 제네바에서 외롭게 독립운동을 벌이던 이승만은 이곳에서 그의 부인이 된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라는 33세의 여성을 만났다. 그는 당시에 58세였다. 그들은 동지적 결합으로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당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에 대한 반성이 지배적인 소위 아메리카 우선주의(America-First) 정책이 압도적인 국민적 지지를 받아 국제적 고립주의를 실천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럽에선 1933년 초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여 파리 평화조약은 물론 로카르노 조약(Locarno Pact)을 위반하면서 재무장과 전쟁 준비를 해나가면서, 독일 히틀러의 침략전쟁의 가능성이 등장하고 있었다. 1938년 영국 정계의 외로운 사자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연설 문집인 '영국이 잠든 사이에(While England Slept)'를 출간하여 임박한 전쟁의 위험성을 알렸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외로운 카산드라의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여전히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을 유지해 나갔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인들과 국가 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른 지 20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새로운 전쟁을 몹시 두려워하면서도 '설마'라는 안이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러다가 1939년 독일의 폴란드에 대한 기습침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으며 예언자적 정치가로 판명된 윈스턴 처칠은 1940년 5월 1일 제63대 대영제국의 수상이 되어 대(對)히틀러 전쟁을 선도하였다.

1941년 6월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의 '주미외교부 위원장'이라는 직함으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이 시기에 미국에선 미국 우선주의가 극에 달해 미국의 국제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1941년 여름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간하여 일본인들의 침략성으로 인한 미일 전쟁을 경고하였다. 처음엔 그도 처칠처럼 황야의 카산드라 같았지만 오히려 곧 일본과의 전쟁을 부추기는 전쟁광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다가 1941년 12월 7일 미국이 일본에 의해 진주만 습격을 받게 되자 이승만은 갑자기 '놀라운 예언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국의 정계와 언론계에서 대미 로비활동을 위한 이승만의 지위가 크게 격상되었다. 윈스턴 처칠 수상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진주만 습격 소식을 듣자마자 "마침내 우리가 이겼다"고 소리쳤다. 어쩌면 이승만도 진주만 기습 소식을 듣자마자 "마침내 한국의 독립이 이루었다"고 고함을 쳤음직하다. 왜냐하면 윈스턴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의 초기부터 오직 미국의 참가로만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선언했다면 이승만도 미일 전쟁을 통해서만 한국의 독립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만큼 미국의 압도적인 국력을 확신하고 있었다.


1917년 볼셰비키 공산혁명 때부터 반공주의자였던 윈스턴 처칠은 1940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만일 히틀러가 지옥을 침공한다면 악마에 대해서 최소한으로나마 호의적인 언급을 할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처칠은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곧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과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945년 종전 과정인 얄타회담에서 처칠은 스탈린과 격돌한 후 다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1946년 처칠은 그 유명한 소위 '철의 장막' 연설을 통해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주의를 경고했다. 그는 이상주의자 우드로 윌슨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아주 현실주의자였다. 이승만 박사는 처칠과는 달리 반제국주의자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처칠처럼 일본제국주의를 대체하려는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주의적 야욕을 누구보다 일찍이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처칠처럼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공산주의 혁명세력을 온갖 어려움 속에서 극복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을 성공적으로 수립하였다. 그의 평생에 걸친 한국의 독립운동이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그는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듯 가장 어려운 정치적 과업을 달성한 것이다. 그는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끝자락에 유일한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수립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국부가 된 것이다.

국부 이승만은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에 비견할 만하다. 조지 워싱턴도 아메리카의 힘겨운 독립전쟁을 치른 후에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미합중국의 국부가 되었다. 조지 워싱턴에게는 친자식이 없었다. 이승만에게도 친자식이 없었다. 미합중국이 조지 워싱턴의 유일한 친자식이라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유일한 친자식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스몰 아메리카(small America)'가 되길 기대했었다. 대한민국 국가 탄생 78주년이 되는 해 대한민국의 국가 형태와 삶의 양식은 분명히 '작지만 선진 아메리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이 국부 이승만의 친자식이 맞다. 진실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승만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길을 택하지 않고 보다 가까운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길을 따라 대통령직 4선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그가 친히 이 땅에 심고 가르친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교육받은 대학생들의 항거를 마주하자 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이승만은 한국 민주주의의 스승이었고 그에게 항거한 학생들은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4·19 학생 민주혁명은 국부 이승만 박사의 일종의 '살모사'가 아니라 소중한 '청출어람'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강성학(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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