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
이재명 정부 출범 후인 2025년 9월 합동참모본부는 이런 지침을 전방 부대에 공식 문서로 하달합니다.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침범할 때는 우리 군사지도와 유엔군사령부의 기준선 가운데 더 남쪽에 있는 선을 채택해 대응하라’. 우리 군의 군사지도와 유엔군사령부의 기준선은 60% 정도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두 기준선 사이에는 최대 수십 미터의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우리 군이 수십 미터를 김정은 정권에 알아서 양보해 버린 것입니다. 유엔사령부와는 아무 협의도 없었습니다.
최근 북한군은 철책을 쌓고 지뢰를 심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수시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군은 이에 대응하는 대신, 군사분계선을 남쪽으로 후퇴해서라도 그냥 못 본 척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어준 그 수십 미터를 전진하기 위해 지금부터 70년 전 우리 선조들은 목숨을 바쳤습니다. 오늘은 이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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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불법 남침이 시작됩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의 공세에 한반도는 공산화 직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을 지킨 혈투를 바탕으로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합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압록강까지 진격해 꿈에도 그리던 통일을 눈앞에 둡니다. 그러나 10월 25일 중공군이 개입하며 다시 후퇴해 1951년 1월 4일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내주는 1·4 후퇴를 맞게 됩니다.
중공군은 2월 공세로 한반도 공산화를 달성하려 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미군과 프랑스군이 사투를 벌인 지평리 전투 승리를 통해 이를 막아냅니다. 3월 15일 서울이 수복됐고 3월 말에는 38선 부근까지 다시 밀고 올라갑니다. 중공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인해전술을 구사했지만 우마차와 인력에 의존하는 보급 지원 체제의 취약성으로 공격 작전을 5, 6일밖에 지속하지 못하는 치명적 약점을 드러냈습니다.
38선을 회복하자 미국은 휴전 협상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3월 24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중공과의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독자 성명을 발표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해임합니다. 이러는 사이 중공군은 ‘서울을 다시 점령해 노동절 선물로 마오쩌둥에게 바치겠다’며 4월 공세를 시작합니다. 4월 22일 서부전선에 30개 사단, 중부전선에 15개 사단이 투입돼 총공세를 벌입니다. 그러나 글로스터 대대를 필두로 한 영국군 29여단의 분전으로 유엔군은 가까스로 이를 막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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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공세는 집요했습니다. 21개 사단과 북한군 9개 사단이 동원된 5월 공세가 이어졌습니다. 국군은 현리 전투의 참패로 위기에 처했지만 용문산 전투의 기록적 대승과 오색-고성-양양 진격전 승리로 기적적인 반격에 성공합니다. 전선은 현재의 휴전선 일대로 고착되기 시작했습니다. 4, 5월 공세에서 18만3000명의 엄청난 병력이 사상을 입거나 실종된 중공군은 더 이상의 공격의지를 상실했습니다.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말리크 유엔 대사가 휴전회담을 제의하고 7월 10일 첫 휴전회담이 개최됩니다. 이로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되는 1953년 7월 27일까지 무려 2년 동안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북한과 중공군은 휴전선 부근에서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을 계속합니다.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한 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대한민국 젊은이과 유엔군이 목숨을 바쳐 고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그중에서도 19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는 가장 유명합니다. 이름 없는 산봉우리가 격전의 현장이 됐고 고지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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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국군 9사단이 중공군 38군의 3개 사단을 궤멸시킨, 6·25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진지전이었습니다. 김종오 9사단장은 “이 일전은 우리 한국군 전체의 명예와 전투 능력에 대한 평가가 달려 있다. 나를 비롯해 우리 사단 장병 전원의 뼈를 저 백마의 산정에 묻기로 하자”고 독려했습니다. 중공군은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로 맨몸에 수류탄만 들고 10열 종대로 새까맣게 개활지로 몰려들었습니다. 뒤에서는 꽹과리를 치고 북을 울리고 피리를 불며 취한 병사들의 흥을 돋웠습니다. 국군 전차 중대의 포격이 쏟아졌지만 중공군은 무수한 시신을 방패 삼아 계속 전진했습니다. 9사단 장병들은 대피호를 파고 1m 전진한 뒤 또 대피호를 파면서 고지 정상에 접근했습니다. 30만 발에 이르는 상호 포격으로 온 산은 불에 타고 바위도 깨져 모래밭으로 변했습니다. 쓰고 있던 철모로 파헤쳐도 대피호를 팔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포탄에 벗겨진 고지의 모습이 백마가 누워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 고지는 백마고지로 불리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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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은 10일 동안 24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 끝에 10월 15일 최종적으로 적을 격퇴하고 고지를 사수했습니다. 중공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와 포로를 내고 궤멸 상태로 전선에서 물러났습니다. 국군 9사단도 3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훗날 1957년 5군단이 세운 백마고지 전적비는 “천지를 뒤흔들던 포성은 잠들고 비 오듯 쏟아지던 총탄은 사라졌다. 이 능선에 다시 평화를 가져오기 위하여 우리 용사들이 흘리고 간 거룩한 피는 송이송이 꽃이 되어 조국의 이름과 더불어 길이 빛나고 있다(후략)”고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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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서도 휴전회담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휴전을 한 뒤 김일성이 또 남침하면 그때는 미군이 다시 참전한다는 보장이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은 강력하게 휴전 협상에 반대했습니다. 국민들도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전국적인 휴전 반대 운동을 벌였습니다. 1952년 12월 유엔군은 휴전회담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평양·원산으로의 진격전을 건의했지만,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유엔군은 인명 손실을 줄이는 데 중점을 뒀고, 반면 국군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총력전을 벌였습니다.
1953년 3월 5일 6·25 남침의 최종 승인자인 소련 스탈린이 사망합니다. 이때부터 휴전회담은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그러자 중공군은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6월 10일 하계 2차 공세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9일 만에 공격을 중지했습니다. 7월 13일 중공군은 휴전 이전 마지막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겠다는 각오로 기습적 총공세를 감행했습니다. 이른바 7·13 공세입니다. 중공군은 중부전선 김화와 화천 일대에서 무려 5개 군(54·60·67·68·21군)으로 국군 2군단을 포위해 섬멸하려고 했습니다. 중공군의 파상공세에 수도사단 육근수 대령이 전사하고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은 포로가 됐습니다. 26연대 1중대 2소대는 최후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전투를 벌이다 전원이 전사했습니다. 6사단 2연대 2중대도 격전 끝에 중대장 김교수 대위 이하 중대원 대부분이 전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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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은 7월 14, 15일 금성천 이남의 적근산과 백암산 부근으로 철수해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손실은 국군보다 더 컸습니다. 병력 손실과 보급 부진 때문에 중공군은 더 이상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7월 16일 8사단, 11사단, 5사단, 미군 3사단이 반격을 개시했고, 7월 19일에는 금성천과 북한강 이남 지역 대부분을 회복했습니다. 2군단은 금성천 북쪽까지 진격하려고 했지만 휴전을 앞두고 확전하지 않으려는 미8군 사령관의 결정으로 더 이상 올라가지는 못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무려 2689명이 전사하고 7548명 부상, 4136명이 실종되는 큰 손실을 입었고, 중공군은 이보다 훨씬 큰 3만3253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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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천 전투의 참혹했던 상황을 참전 용사 이기정은 6·25전쟁 증언록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방아쇠만 당기는 반사 작용만 있을 뿐이다. 그나마 고참은 머리를 들고 총부리를 산 아래에 대고 갈겨대지만 매일같이 새로 보충되는 신병들은 머리를 철모 속에 파묻고 총부리를 허공에 치켜 세운 채 앉아서 마구 울며 방아쇠만 당긴다. (중략) 포성이 멈췄다. 곧 시작되는 혈투 백병전으로 별안간 적병이 호 속으로 뛰어 들어오는 공포가 엄습하는 가장 무서운 순간이다. 숨을 죽이고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입이 마르는데 돌연 ‘적이다’ 악쓰는 소리와 함께 푸다닥 푸득 소리와 기합 소리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소란한데 나는 흙먼지에 덮여 몸을 움직일 수 없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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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신음 소리와 터지는 울음소리가 뒤섞인다. 흙을 털고 산허리를 보니 중공군 시체들이 수없이 널려 있다. 저쪽의 금성천은 어제와 다름없이 흐른다. 진지를 점검하니 이미 숨져 흙먼지 속에 묻혀 있는 병사, 살이 찢어져 흰 뼈가 드러난 다리를 부여안고 나를 쳐다보자 울음을 터뜨리는 병사, 어깨에 관통상을 입어 유혈이 심해 숨이 꺼져가는 병사 등 피와 재먼지로 누구인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처참하게 죽어 호에 박혀 있는 중공군 시체를 8부 능선 아래에 널려 있는 적의 시체들 위에 내던지고는 오늘 밤 또다시 겪어야 하는 전투 대비 작업을 시작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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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4월 하순부터 7월 하순까지 중공군의 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은 6만47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중공군과 북한군은 13만54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휴전을 앞둔 마지막 전투가 이렇게 치열했던 것입니다. 1m를 전진하기 위해 이처럼 많은 청춘이 조국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김정은 정권은 6·25 불법 남침에 대해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도 대한민국 지도를 펼쳐 놓고 김정은이 남침 작전을 지시하는 사진을 버젓이 공개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대한민국은 적국이니 거침없이 물리력을 사용하라고 공언했습니다. 우리가 성취한 모든 것을 한순간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핵탄두를 100개 안팎 보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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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이재명 대통령은 “우리가 오랫동안 북한을 군사적으로 위협해 북한이 불안해했다”는 상식 밖 발언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잊고,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나라는 역사의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호준석 국민의힘 전 대변인, 현 서울 구로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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